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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철학이야기] ‘기로’에 설 때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예나 지금이나 세상살이는 매한가지다. 요즘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들은 대체로 기로에 서 있다. 기로란 '갈림길'이다. 권좌에 오를수록 길은 험하고 번민은 깊기 마련이다. 더구나 한 리더의 공을 위해 만 사람의 뼈가 마르는(一將功成萬骨枯) 특수 상황에서 온 나라가 존망의 기로에 선 듯하다.

"열 십자 복판에 내가 섰소./갈래갈래 갈린 길…." 어느 인생인들 갈림길 앞에 한두 번 서보지 않았으랴. 어차피 일생은 기로 속에서 헤매는 일이다(一生岐路中). 훤한 빛 속으로 걸어가든, 깜깜한 어둠 속으로 걸어가든, 각자 갈 길이 따로 있다. 어떤 이는 성공과 영광의 길로, 어떤 이는 실패와 좌절의 길로 가야만 한다. 때론 쓰러지고 엎어지더라도 신의 한 수로 큰 기회를 얻기도 한다. 그래서 기로에 서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선택의 탁월함에 있다.

누구나 탄탄대로의 꽃길만 걷고 싶겠으나 그건 희망만으론 안 된다. 하늘이 돕고 땅이 받쳐줘야 한다. 큰일 작은 일 가릴 것 없이 다반사로 기로에 서다 보니 '기로'라는 노래도 있다. "어디로 가나요 이제 여기서/아직도 자꾸만 난 길을 잃어요/어떻게 살까요/아무리 물어도/대답해 줄 사람이 없죠〜." 그렇다. 남에게 물어봤자 어느 하나 속 시원히 대답해줄 리 없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갈림길에선 스스로 고민해서 결정해야 한다. 이기주의자로 통하는 양주(楊朱)는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뉜 것을 보고 울었다. 남쪽으로도 갈 수 있고 북쪽으로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박애주의자로 알려진 묵적(墨翟)은 물들이지 않은 실을 보고 눈물을 쏟았다. 노란색으로도 검은색으로도 물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갈림길에 서면 어느 쪽이든 용기를 내어 택해야 하니 모험과 책임이 뒤따른다. 그만큼 불안하다. 답답한 나머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각종 점집이나 상담소를 찾기도 한다. 물론 이것도 하나의 해소 방법이긴 하나, 대개 자기 의지나 이성적 판단에 따라 길을 택한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길을 택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이성적 판단을 존중한다. 그다음엔 좌고우면하지 않고 배짱 있게 자신이 선택한 길로 '고!'한다. "길이란 이어져 있어 계속 가야만 한다는 걸 알기에/다시 돌아올 수 없을 거라 여기면서…"(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그냥 쭈욱 걸어간다.

하지만 허다한 경우 '갈림길 속에 또 갈림길'이 있을 수 있다. 난관 속 또 다른 난관이 겹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빈털터리로 돌아올 수 있다. 양을 잡으려 쫓아가다가 갈림길 속에 또 갈림길이 있어 끝내 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저 '망양지탄(亡羊之歎)'의 고사가 이를 잘 말해준다.

여기서 참고할만한 것이 있다. 근대철학의 시조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숲속에서 길을 잃게 된 나그네는 이곳으로 저곳으로 왔다 갔다 해서는 안 된다. 또 한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된다. 가능한 한 똑같은 방향으로만 일직선으로 걸어가야 한다."

만일 길을 바꾸지 않고 계속 걸어간다면 나그네는 어떻게 된다는 걸까? "목적지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그는 숲속에서는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우왕좌왕 말고, 계속 일직선으로 걷다 보면, 비록 목적지엔 닿지 못하더라도 미로는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성적 해결법 중의 하나이리라.

한편 가능한 한 여기저기에 물어보며 가장 안전한 쪽을 택하느라 고민하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는 대개 합리적 성격의 부류이다. "합리적인 사람은 세상에 적응하고, 비합리적인 사람은 세상을 자기 자신에게 맞추려고 고집을 부린다. 그러므로 모든 진보는 불합리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

이런 버나드 쇼의 명언이 말해주듯, 세상에 잘 적응하며 안전하게 사는 사람이 많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넌다는 식.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을 택하게 보니, 큰 변화나 파격은 없다. 그만큼 큰 어려움도 없다.

다만 갈림길에 아예 서지 않는 달통한 안목의 사람도 있겠다. 눈의 감각이 아니라 천품의 직관력으로, 자연의 순리에 길을 걷는 경우이다. "감각으로 아는 것을 멈추고, 타고난 정신이 가고자 하는 대로 따른다. 자연의 결(天理)에 의지하고, 큰 틈새를 따라서 간다.

그래서 세상의 에고를 지탱하는 '내가 낸데〜'하는 "단단한 뼈는 말할 것도 없고, 인대나 힘줄도 아예 건드리지 않는다." 이런 『장자』의 '포정해우' 비유에 따른다면, 애당초 갈림길은 비껴가는 게 최상이다. 구태여 칼을 갈아가며 심각하게 살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말할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사라진"(言語道斷, 心行處滅), "물에도 빠지지 않고 불에도 타지 않는" 경지엔 아무나 들락거릴 순 없다. 하기사 일상 속에 더러더러 성자가 있을 줄 또 누가 알겠는가.

평범한 삶들은 수도 없이 흔들리며, 다시 또다시, 기로에 서곤 한다. 그만큼 삶의 가능성이 갈래갈래 남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기로에도 서지 않는다는 건 삶의 가망성을 잃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기로에서 기회를 건져내는 힘은 잔머리가 아니라 자신의 깜냥에 대한 진정성 있는 직시이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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