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각과 전망] 상냥하지 않은 미국이 다가오고 있다

최경철 편집국 부국장 겸 동부지역 취재본부장
최경철 편집국 부국장 겸 동부지역 취재본부장

어린 시절 대구 남구 앞산 밑에 살았던 기자에게 7월 4일은 폭죽이 터지는 날이었다. 포항 국제불빛축제에서 터지는 화려한 불꽃처럼 미국 독립기념일인 이날엔 앞산 밑 미군부대에서 쏜 폭죽이 대구 하늘을 뒤덮었다. 볼거리이기는 했다. 하지만 철이 들자 불꽃놀이까지 하면서 자기 나라 독립기념일 행사를 다른 나라 땅에서 요란하게 하는 것은 이상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이 이 땅에서 이따금 교만한 행동을 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지만 미국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다. 1948년 5·10 총선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 절차를 시작했던 우리나라는 선거 직후부터 신생국이 결코 홀로 설 수 없음을 실감했다. 일제에 의해 북한에만 편중됐던 전력 시설을 악용, 북한은 총선 직후였던 5월 14일 단전 조치를 취했고 전기가 끊긴 남한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미국은 즉각 해결사로 나섰고 부산항과 인천항에 '발전선'을 띄운 뒤 해상에서 육상으로 전기를 공급, 전력난에 빠진 우리를 도왔다.

1949년 모든 병력을 남한에서 철수시켰고 "한국은 미국의 방어선 밖에 있다"는 에치슨 라인까지 설정했던 미국은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남침 도발을 감행하자 즉각 자세를 바꿨다.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 발발 이틀 뒤인 6월 27일 미 공군·해군에 즉각 행동 개시를 명령했고, 6월 30일이 되자 일본에서 점령 임무를 맡고 있던 미 지상군 병력도 투입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뛰어난 외교적 수완도 발휘, 유엔 안보리 결의를 통해 '안보리의 명령을 준수하기 위한 전쟁 수행'이라는 명분까지 만들어 냈고 미군 참전의 당위성, 그리고 반전 여론에 대응할 수 있는 지속가능성도 담보해 냈다.

미국의 즉각적 참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공산화됐고 김정은 밑에서 신음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은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6·25전쟁 발발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안보와 무관하다고 선언했던, 미국 본토와 멀리 떨어진 작은 나라에 미국은 막대한 병력을 투입했다. 미국의 위대한 외교관인 헨리 키신저의 표현을 빌리면 미국은 이익이 아닌 원칙을, 권력이 아닌 법을 수호한다는 태도로 참전했고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미국은 굳건한 한미 동맹을 통해 우리를 지켰고 대한민국 번영을 이끌어 냈다.

연말 미국 대선에서 사법 리스크까지 벗어던진 도널드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우세해지면서 나라 전체에 긴장감이 높아졌다. 미국의 이익만 생각하겠다는 트럼프 앞에서 한미 동맹은 해체될 수 있고, 상상할 수 없었던 비용의 지불이 수반될 수도 있다. 트럼프가 북핵을 용인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지도자의 능력은 예측되지 않는 우발적 상황을 상정해 사전에 위기를 막을 수 있는 데서 나온다. 한미 동맹을 무한 신뢰해서는 안 된다며 자주국방을 들고나왔고 세계 최강 미국에 눈을 부라리기도 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헌정사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꼽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트럼프의 재등판이 불러올 예측 불가의 미국을 윤석열 정부는 다가올 미래로 상정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북한의 상냥함을 기대했다가 처절한 실패를 맛본 것처럼 상대의 선의에 기대는 태도는 국익도, 평화도 담보할 수 없다. 70여 년 혈맹이지만 트럼프의 미국이라면 달리 봐야 한다. 핵무장을 우리의 전략 노트에 포함시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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