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과 영천에서 산이 무너져 사람들이 압사(壓死)했다." 성종실록 1476년 7월 21일 자의 기록이다. 약 200년 후인 1669년 "대구에서 3월 7일 산허리가 터져 벌어졌는데 길이가 182보(218m)였고 너비가 15보(18m)였으며, 깊이는 3~4장(9~12m)이었다. 산이 터질 때 잠시 비가 내리고 천둥이 있었다"라고 현종실록은 적고 있다.
그로부터 43년이 흐른 해에 많은 사람이 죽고 집들이 쓸려 가는 대규모 피해가 발생했다. 숙종실록 1712년 9월 6일 자는 "경상남도 합천의 도굴산 북쪽 등성이 산허리 이하가 모두 갈라져 하나의 구덩이가 됐다. 산 밑의 인가는 50보(60m) 밖으로 스스로 옮겨 갔다. 울타리와 채소밭, 과일나무도 무더기로 밀려갔다. 하동 등지에서는 매몰돼 죽은 사람이 200여 명이고, 떠내려간 집이 1천500여 채가 된다"라고 전한다.
예로부터 경상도는 산사태 위험 지역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연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창우 국립산림과학원 박사의 '역사 기록서 고찰을 통한 조선시대 산사태 특성 분석'을 보자.
이에 따르면 조선시대 산사태의 원인은 비로 인한 경우가 81%였다. 시기는 7~9월에 72%가 발생했다. 지역별로 보면 강원과 서울, 경기, 경북, 경남 등의 순으로 잦았다. 공교롭게, 산림청의 지난해 산사태 위험 지도에서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면적이 가장 넓다. 장마와 태풍 등 비가 집중되는 여름철, 예나 지금이나 강원도와 경상도는 산사태 최고 위험 지역이다.
특히 산이 많은 지형적 특징과 태풍 길목이라는 지리적 여건이 큰 영향을 미친다. 조선 때는 벌채와 개간으로 산림이 황폐하고 치산치수(治山治水) 시설도 부족해 특히 산사태 피해 규모가 컸다. 최근에는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집중호우가 빈번해 산사태 위험성을 높이고 있다.
또 하나 눈여겨볼 대목은 재난 이후에는 구휼(救恤)과 문책(問責)이 뒤따랐다는 점이다. 조선의 조정은 산사태 피해 주민들에게 구호 물자를 보냈다. 전체 발생 건수의 17% 비율로 곡식과 장례비 지급, 농지세 감면 등의 지원을 했다. 책임도 물었다. 영조 때인 1752년에는 경기도 포천에서 발생한 산사태의 지형을 상세히 알리지 않은 관리를 처벌했다.
실록 속 기록처럼 지난해 또다시 경북에서 산사태가 발생했다. 순식간에 흙이 밀려와 마을을 밀어 버렸다. 피할 새도 없이 경북에서 29명이 목숨을 잃었다. 가족과 이웃은 망연자실했다. 1년이 지났지만, 재난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다. 파괴된 흔적은 군데군데 남아 있다.
이런 가운데 산림청의 산사태 취약 지역 관리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최근 드러났다. 감사원 감사를 통해서다. 위험 조사를 형식적으로 하거나, 정작 위험도가 높은 곳을 취약 지역으로 지정하지 않았다. 또한 주민 대피 체계가 마련돼 있지 않거나, 위험 구역 내 시설을 대피 장소로 지정하는 등 허술함이 확인됐다.
이와 같은 국가와 사회의 엉성한 대비가 재난을 키운다. 퍼붓는 비와 무너지는 산을 넋 놓고 보는 '천수답'(天水畓) 대책이나, 피해 이후에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처방은 더는 없어야 한다.
잘못된 행정은 책임을 물어야 한다. 집을 잃은 피해민을 위한 구휼도 필요하다. 임시 거주 시설의 기한이 점점 다가온다. 또다시 장마가 시작됐다. 늦기 전에 대비하고, 하루빨리 지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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