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덕일의 우리 역사 되찾기] 신당전쟁의 격전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대신라 강역은 만주지역…'대동강 남쪽' 축소 왜곡된 역사
신라-당나라 중요 격전지 '매소성'…대모산성·대전리산성 중 한 곳 예측
사실상 당 군사 20만명 주둔 불가능…실제 전쟁터는 요동 지역으로 봐야
현재 역사교과서에 '나당전쟁' 표기…국호 앞 글자 딴 '신당전쟁'이 맞아

매소성 전투도. 오승우 화백(1975). 전쟁기념관 소장
매소성 전투도. 오승우 화백(1975). 전쟁기념관 소장

현재 사용하는 모든 역사교과서는 신라와 당의 전쟁을 나당전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국호의 앞 글자를 따서 신당전쟁이라고 해야 한다. 역사교과서는 이 전쟁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을까?

◆삼국통일인가 영토축소인가?

가장 많은 학교에서 사용 중이라는 비상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는 '나·당전쟁과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항목에서 "당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43쪽)"라고 말하고 있다. 당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는 것으로 신라강역까지 차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당과 신라는 신당연합군을 꾸려서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당이 신라땅까지 차지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같은 교과서는 "이에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하여 고구려 유민을 포섭하는 한편, 사비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을 몰아내었다. 이어 매소성 싸움에서 당을 크게 격파하여(675) 나·당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기벌포 싸움에서도 당의 수군에 대승을 거두었다(676)."고 말하고 있다. 당이 신라땅까지 차지하려고 하자 신당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니 당이 신라땅은 그냥 두었으면 신당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인가? 같은 교과서는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이남 지역에서 당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676)"라고 말하고 있다. 당이 신라땅까지 빼앗으려고 하자 신당전쟁을 일으켜 대동강이남 지역을 차지해서 '삼국통일'의 기염을 토했다는 것이다. '삼국통일'이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 진흥왕 때 순수비를 세웠던 함경도 지역도 빼앗겼다는 것이다. 인류역사상 이런 통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신라 사람들은 이를 통일이라면서 기뻐했을까?

◆매소성은 어디인가?

위의 교과서는 신당전쟁의 중요한 분수령 중의 하나로 '매소성' 전역을 들고 있다. 매소성(買肖城:매초성) 전투는 문무왕 15년(675) 9월 29일 일어났는데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당나라) 이근행(李謹行)이 20만 군사를 이끌고 매소성에 주둔했는데 우리 군사가 공격하자 도주했다. 군마 3만380필을 흭득하고 나머지 병장기도 그만큼 획득했다."(《삼국사기》 〈문무왕 본기 15년〉)

당군 20만과 싸운 매소성의 위치는 어디일까? 한국 사학계에는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의 대모산성(大母山城), 또는 경기 연천의 대전리산성으로 비정한다. 양주 대모산성은 해발 213m의 구릉부 정상에 축조된 둘레 약 718m 정도 되는 산성이다. 연천군 청산면 대전리의 대전리 산성은 해발 138m에 쌓은 둘레 약 700m의 산성이다. 두 견해 중에서 한국 고대사학자들은 연천 대전리산성을 매소성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런데 두 산성을 답사해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두 산성은 어느 모로 보아도 당군 20만 명이 주둔할 수 있는 성은 아니다. 그 1/10인 2만 명만 주둔해도 서로 어깨를 부딪칠 수밖에 없는 협소한 산성이다. 정상적인 역사학자라면 "이 두 산성은 매소성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하지만 미리 정해놓은 결론에 모든 논리를 꿰어 맞추는 한국 사학계는 다르다. 자신들의 생각과 맞지 않으니 "사료가 틀렸다"는 것이다.

즉 《삼국사기》의 20만 명은 과장된 것이며 실제로는 4만 명이라는 것이다. 20만 명이라는 기록을 왜 4만으로 축소하느냐는 질문에 이는 신당전쟁에 투입된 전체 당군의 숫자 20만 명을 적은 것이라고 둘러댄다. 《삼국사기》의 당군 20만 명을 부정하는 논리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 하나뿐이다.

《삼국사기》는 이때 신라가 획득한 3만380필의 말을 '전마(戰馬:전투마)'라고 적었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학자들은 전마가 아니라 물자를 수송하는 짐 싣는 말, 즉 태마(駄馬)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라가 20만 당군과 싸워서 이겼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억측들이다.

◆매소성 전투와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

매소성 전투는 김유신의 둘째 아들 김원술과 관련이 있다. 《삼국사기》 〈김원술 열전〉에 따르면 원술은 신당전쟁 때 석문(石門) 들판에서 당·말갈연합군과 싸우다가 패배했다. 김원술이 싸우다 죽으려 하자 그를 보좌하는 담릉(淡凌)이 "대장부는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곳을 찾는 것이 어렵습니다"라면서 여기에서 죽는 것보다 "살아서 나중에 공을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렸다. 원술이 "장차 어찌 내 아버지를 볼 면목이 있겠는가"라면서 죽으려 했으나 담릉이 말고삐를 잡고 놓아주지 않아서 끝내 죽지 못했다. 석문전투에서 패전한 신라군이 돌아오자 김유신은 문무왕에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했을 뿐 아니라 가훈도 저버렸으니 목 베어 죽여야 합니다"라고 주청했다. 문무왕은 "비장에게만 무거운 형벌을 내릴 수 없다"고 사면했지만 김유신은 아들을 버렸다. 김유신이 죽자 원술이 조문 왔는데 유신의 부인은 "원술은 이미 선군(先君:김유신)에게 아들됨을 얻지 못했는데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될 수 있겠느냐?"면서 조문을 거절했다. 원술은 탄식하면서 태백산에 은거하다가 을해년(675)에 매소천성(買蘇川城) 전투에서 공을 세운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나라 군사가 매소천성(買蘇川城)을 공격하자 원술이 듣고 죽기로 싸워 지난 수치를 씻고자 하였다. 마침내 힘껏 싸워서 공을 세워 상을 받았으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을 분하고 한스럽게 여겨서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았다."(《삼국사기》 〈김원술 열전〉)

그 사실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매소천성(買蘇川城)을 앞의 매소성(買肖城)으로 본다.

신라 문무대왕 수중릉. 권태균 사진
신라 문무대왕 수중릉. 권태균 사진

◆대방은 어디인가?

그런데 김원술이 패전했던 석문들판의 전투를 보면 신당전쟁의 전쟁터가 어디였는지 알 수 있다. 《삼국사기》는 당군과 말갈군이 석문들판에 진영을 설치하자 신라군은 "대방(帶方)의 들판에 진영을 설치했다"고 말하고 있다. 대방은 낙랑과 함께 한국사의 주요 장소를 말해주는 랜드마크(Landmark), 곧 주요 지형 중의 하나이다. 현재 한국 고대사학계는 대방군의 위치를 황해도라고 보고 있다. 뚜렷한 사료적 근거가 있어서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다.

중국 위·촉·오(魏蜀吳)의 역사를 저술한 진수(陳壽:233~297)의 《삼국지(三國志)》 〈동이열전 한(韓)〉조에는 "건안(建安:196~220) 중에 공손강(公孫康)이 (낙랑군) 둔유현(屯有縣) 남쪽의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을 설치했다"고 나온다. 공손강은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동쪽과 요녕성(遼寧省) 서쪽 일대에 있던 옛 요동군을 다스리던 요동태수였다. 요동지역에 있었던 낙랑군 산하의 둔유현을 나누어 대방군을 설치한 것이다. 따라서 그 대방군은 지금의 황해도가 아니라 고대 요동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한국 고대사학계는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으니 대방군은 황해도에 있었다는 식이다.

낙랑군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는 사료는 한 둘이 아니다. 《삼국지》를 쓴 진수(陳壽)는 진(晉)나라의 사람이었는데 진나라 정사인 《진서(晉書)》 〈지리지 평주(平州)〉조에는 평주 산하에 '창려군, 요동국, 낙랑군, 현도군, 대방군'의 다섯 군국(郡國)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중 대방군에 대해서 《진서》는 "공손도(公孫度:공손강의 아버지)가 설치했는데, 일곱 개 현을 관장하며 호수는 4천900이다"라고 말하면서 대방군이 관장하던 일곱 개 현 중에 대방현과 열구(列口)현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중 열구현이 중요하다. 《후한서》 〈군국지(郡國志)〉는 열구현에 대해서 "곽박(郭璞)이 주석한 《산해경(山海經)》에 '열(列)은 강 이름인데, 열수(列水)는 요동에 있다'라고 말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열구현은 열수라는 강의 입구에 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인데, 그 열수는 고대 요동에 있다는 것이다. 즉 열수라는 강이 고대 요동에 있었고 그 강 입구에 세운 열구현은 물론 대방도 황해도가 아니라 고대 요동에 있었다는 것이다.

◆신당전쟁의 싸움터는 만주와 하북성

앞의 교과서의 설명대로 신라가 대동강이남 지역을 얻고 "삼국통일을 달성했다"면서 환호했으면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수도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가 옮겨 다닐 필요가 없었다. 당의 정사인 《구당서(舊唐書)》 〈지리지 안동도호부〉조는 총장(總章) 원년(668) "평양성을 뿌리 뽑고 그 땅을 안동도호부로 삼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안동도호부의 위치를 지금의 북한 평양이라고 보지만 이는 사료적 근거를 가지고 고증한 결과가 아니라 '지금의 평양=당나라 안동도호부'라는 도식에서 나온 것이다.

《구당서》는 매소성 전투 이듬해인 상원(上元) 3년(676) "안동도호부를 요동군 옛 성으로 옮겼다"고 말하고 있다. 신라가 대동강 이남을 얻고 희희낙락하고 있는데 당은 왜 그 북쪽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겨야 했을까? 이듬해인 의봉(儀鳳) 2년(677)에는 안동도호부를 다시 신성(新城)으로 옮겼다가 개원(開元) 2년(714) 평주(平州)로 다시 이전했다. 《구당서》 〈천문지(天文志)〉는 당나라 평주를 옛 고죽국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고죽국은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이다. 안동도호부가 이리저리 옮겨 다닌 것은 신당전쟁과 고구려 부흥운동 때문이었다. 안동도호부가 옮겨간 평주 대방군 지역이 당·말갈연합군과 신라군이 격돌했던 곳이다. 이 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끝났고 이때 신라는 고구려의 만주강역 대부분을 차지했다. 진성여왕 때 최치원이 작성해서 당나라에 보낸 〈양위표〉에서 신라강역이 "또한 백이숙제의 고죽국과 강토가 연달아 있었다"고 말한 것이 이를 말한 것이다. 비록 대진(발해)이 들어서면서 일부 퇴각했지만 대신라(통일신라)의 강역은 계속 만주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크게 왜곡된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대동강 남쪽으로 축소시킨 대신라(통일신라) 강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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