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가정통신문 언제까지 내요?", "제 필통이 없어졌어요", "OO가 자꾸 놀려요!"
중1 교실은 질문 바다이다. 여기저기서 나를 찾는다. 조금만 생각하면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자꾸만 묻는다. 나는 "응, 가정통신문 목요일까지야"라고 친절하게 말해주는 담임 교사가 아니다.
"며칠까지인지 스스로 알아봐",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지 방법을 강구해 봐", 필통이 없어졌다는 이야기에도 마찬가지. "그 친구에게 기분 나쁘다는 표현은 정확히 했니? 확실히 하고도 계속 하면 다시 얘기하러 와", 놀린다는 것도 일단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기회를 준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처음에는 이것저것 다 해주는 게 맞는 건가 싶기도 했는데 1학기 말쯤 되자,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벼운 문의 사항은 현저히 줄었고 나는 자연스레 학생들을 살필 여유가 생겨 비교적 묵직한 학급 일들에 신경 쓸 수 있었다. 학급 운영의 효율성이 높아졌다. 가장 값진 효과는 바로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선생님, 친구한테 물어보니 가정통신문 목요일까지 내야 한다던데, 하루 늦게 내도 괜찮을까요?", 자신의 일을 문의하며 마치 남의 일 얘기하듯 임하던 아이들이 이렇게 변했다. "선생님, 혹시 찾아주는 친구 있으면 상점 주실 수 있나요?", 필통을 찾던 학생은 단톡방에 본 사람 알려달라는 글을 올리고 스스로 강구해 본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제가 기분 나빠하는 줄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장난으로 계속 그런 거라고. 기분 나쁘다 말하니 사과하더라고요", 친구가 놀린다고 얘기했던 학생들은 스스로 해결한 뒤 이렇게 말했다. 그 과정에서 기분 나쁘다는 표현을 잘 못하는 학생들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 경우에는 가정과 협력해 지속적으로 자기표현을 하도록 지도했다. 이 역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지도하며 얻은 해결책이다.
여학생들은 점심시간마다 돌아가며 대화하는 진풍경을 보였다. 분명 어제까지 친한 사이였는데 어느새 서로 싸늘하다. 심지어 우는 아이도 있다. 이럴 때 아이들은 교사를 찾아와 괴로움을 호소하지만 뾰족한 수는 없다. 학생 사이에 개입하는 건 정말 신중해야 하는 일이기에. 그런데 2학기가 돼 가만히 관찰하니 13~14명의 여학생들이 멤버를 바꿔가며 1대1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진심을 왜곡하지 않는, 가장 진실에 가까운 단어를 찾기 위해 그들은 열심히 대화했다. 두 명 사이에 다른 친구가 끼어 중재하는 모습도 관찰할 수 있었다. 교우관계는 이렇게 교사의 지도보다 친구들과 치열하게 대화하고 주변 친구의 도움을 받으며 헤쳐 나가는 게 효과적인 영역이다. 혹여 친구와 관계가 뒤틀리더라도 그것까지도 스스로 해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내가 인간관계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유능감을 느낄 때 행복해진다
"도영이가 해 봐."
딸이 4~5살 무렵 내가 제일 많이 했던 말이다. 숟가락이 입을 향하는 과정에서 음식물이 다 떨어지더라도, 양치질을 하다 방금 갈아입은 옷을 다 버리더라도, 큰일 뒤처리에 미숙해 배변 잔여물이 속옷에 남아 있을지라도 스스로 하도록 가르쳤다. 그러면 아이는 미션을 끝낸 후 이렇게 말하곤 했다. "도영이가 했다! 내가 했다!"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뿌듯해하는 그 표정을 중학교에서도 볼 수 있다니.
어깨가 축 처져 있는 학생을 보면 나는 무언가 시키고 싶어진다. 자꾸만 심부름을 시킨다. "이거 행정실에 좀 가져다 내줄래? 교실에서 OO를 좀 불러줄래?"와 같은 단순한 것부터 시작해서 "OO가 의욕이 좀 없어 보이는데 좋은 방법 있을까? OO랑 OO 사이를 좋게 만들 방법 있을까? 아이들이 교실 쓰레기 분리수거를 잘하게 하는 좋은 아이디어 있을까?"같은 것까지. 단순한 것부터 시작해 서서히 생각할 문젯거리를 던지면 아이는 왜 나에게 그런 것을 묻느냐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면 어떨까요, 이 방법은 어떨까요'하며 해결책을 제시한다.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표정도 밝아지고 자연스럽게 학급 구성원으로 자리 잡는다.
이에 나는 다시 한번 느낀다. 이것저것 시키고 생각해 보라 하면 귀찮게 마련인데 어떻게 그 아이 표정은 밝아졌을까. 아이들은 다 해주는 것보다 스스로 하기를 원한다. 스스로 무언가 해냈을 때,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통제해 나갈 때, 나를 내가 꾸려나갈 수 있을 때, 유능감을 느낄 때 행복해한다. 때로는 어른들의 과도한 우려 때문에 그 행복을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우려가 아닌 욕심일 수도 있다. 내가 해주고 말아야 속이 편하다든가 해 주는 데서 내 존재 의미나 가치를 느낀다든가. 그렇지만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다면 혼자 해내도록 둬야 한다. 그 과정이 서툴더라도, 그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이 클지라도 말이다. 이와 관련해 다음 대화가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선생님, 엄마한테 전화해도 돼요?"
"왜?"
"배 아픈데 학교 올 때 약을 안 가져와서 엄마한테 갖다 달라 하려고요."
"한두 번이 아닌데 네가 잘 챙겨오지. 갖다주시려면 어머니 힘드시잖아."
"아니요, 우리 엄마는 그런 거 갖다주는 거 좋아해요. 초등학교 때도 맨날 그랬어요."
교실전달자(중학교 교사, 조운목 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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