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늙은 퇴계가 어린 선조에게

김교영 논설위원
김교영 논설위원

68세 퇴계 이황 선생이 갓 왕위에 오른 16세 선조에게 헌정(獻呈)한 책이 있다. '성학십도'(聖學十圖·1568년)다. 퇴계는 어린 임금을 위해 경연(經筵:임금이 유학의 경서를 강론·연마하고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는 행사)에 아홉 차례나 참여했다. 국정 운영의 견해와 해법을 담은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도 올렸다. 그러나 성에 차지 않았다. 퇴계는 병을 이유(벼슬길에서 환멸도 느낌)로 나랏일에서 물러났지만, 선조가 성군(聖君)이 되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보다 컸다. 그런 뜻으로 지은 게 '성학십도'다.

성학(聖學)은 어질고 뛰어난 군주가 되기 위한 학문이다. 성학십도는 열 개의 그림(十圖)을 곁들여 성학의 요체를 설명했다. 책에는 퇴계의 충심이 드러나는 문장이 있다. "백성의 지도자가 된 분의 한 마음은 온갖 징조가 연유하는 곳이고, 모든 책임이 모이는 곳이며, 온갖 욕심이 잡다하게 나타나는 자리이고, 가지가지 간사(奸邪)함이 속출하는 곳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해 방종이 따르게 된다면, 산이 무너지고 바다에 해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 위기가 오고 말 것이니, 어느 누가 이러한 위기를 막을 수 있겠는가." 왕의 마음가짐이 반듯하지 않으면, 나라가 나락(那落)에 떨어질 수 있다는 충고다. '대학'에 나오는 '성의정심'(誠意正心)을 강조한 듯하다.

퇴계는 평소 제자들에게 "경계하고 신중하며, 두려워하고 조심하라"고 강조했다. 이 한 문장에는 선비(군자)의 실천 덕목이 다 들어 있다. 성학십도의 '경재잠'(敬齋箴)에는 이런 내용도 나온다. "땅을 밟을 때는 가려 밟고, 개미집도 돌아가라." "(안과 밖에) 틈이 벌어지면, 사욕이 만 가지나 일어나게 된다." 신독(愼獨), 즉 누가 보지 않아도 바른 자세를 유지하라는 잠언(箴言)이다.

조선에서 퇴계가 그랬듯이, 이탈리아에선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그러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1513년)을 지어 권력자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쳤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목적이 정당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마키아벨리즘)고 주장했다. 도덕이 곧 정의였던 중세 시대에선 이단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생존이 선(善)'이었던 시대에 자신의 조국 피렌체가 부강(富强)하기를 소망했다. 그렇다면 '군주론'은 폭력의 시대에 맞는 '권력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군주론에서도 '아부'(阿附)는 경계 대상이었다. "아부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면, 군주는 아부의 먹이가 되고 만다. 궁정에 아부꾼이 가득하면, 매우 위험한 사태가 초래될 수 있다."

권력자는 곁을 잘 둬야 한다. 이는 정부와 정당, 기업, 그 어떤 조직에서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겨야 한다. 지금 용산과 여의도는 어떤가? '모든 게 다 잘될 것'이란 보고에 눈이 가려지면 국정이 흔들린다. '아버지·손흥민·정조·예수님' 같은 아첨에 귀가 홀리면 정치가 흐려진다. 나라 경제는 위태롭다. 국민 삶은 고단하다. '신3고'(고물가·고금리·고환율)로 인해 경기는 가라앉았다.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세계 주요 국가 중 1위다. 자영업자와 청년들은 빚 내서 빚 갚고 있다. 노인 빈곤율(39.3%)은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매일 6명이 일터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 하루 36명이 스스로 세상을 등진다. 나라는 곤궁(困窮)하고, 국민은 핍진(乏盡)한데, 정치는 무용(無用)하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기가 하염없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