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강력한 놓아버림

김미옥 수필가(대구보건대 교수)

김미옥 수필가
김미옥 수필가

감정을 조율한다. 저만치 두고 바라보려니 손이 필요하고 가까이 두고 함께 하려니 속내가 불퉁거린다. 털어내야 하는 건지 감당하고 가야 하는 건지 모를 일이다.

일이 복잡하게 엮이고 있다. 행사를 도와줘야 할 사람 마음이 갑자기 바뀌었다. 순차적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애타는 심정이 되어 발은 동동거리고 얼굴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아쉬운 참에 내용을 모르는 봉사자 몇 명과 진행하기로 맘먹었다. 일정을 전달하려니 말보다 성급한 심정이 앞서 안건보다 감정 봇짐이 먼저 쏟아진다. 듣고 있던 이의 얼굴에 당혹감이 가득하다. 원인도 모른 채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행사를 제대로 시작하지 못할까 봐 머쓱한 심정과 답답한 마음이 안달복달하게 만든다. 일손이 부족한 상태에서 원하는 효과를 얻으려니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대로 의견이 어긋나고 환경은 환경대로 애를 먹인다. 이대로는 곤란하다. 지금 상황을 대처할 방법을 세워야 한다.

어릴 적,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하는 일에 어긋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목청의 크기 정도로 심각성을 짐작하며, 나는 방으로 들어가 상황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문제는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가족 나들이가 탈이었다. 모두가 설레는 마음으로 외출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서는데 갑자기 아버지는 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렸던 그때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도무지 내 마음은 알아주려고 조차 하지 않는 성난 표정에 조바심이 끝을 치달았다.

들떴던 마음이 침울하게 바뀌고 있었다. 분명 조바심을 내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언니와 오빠가 돌아가며 아버지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지만 아무 소용이 없자 어머니는 곁에서 아버지의 심기를 녹이려 애를 썼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아버지의 눈빛은 전혀 상황을 녹이려 들지 않았다. 결국 모두가 포기하고 허탈한 표정으로 집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어머니조차 나들이를 가지 말자며 단호하게 돌아선 그 순간, 꿈쩍도 않던 아버지는 그제야 슬그머니 모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진작 조바심을 내려놓고 받아들이는 게 옳았다. 지금 떠올리면 그때의 나들이 추억은 남아 있지도 않고 떠나기 전의 애타던 감정만 기억하고 있다. 지금껏 그 원인을 나에게 말해준 사람은 없지만 나는 몇 번의 경험으로 짐작할 뿐이다. 이후로는 즐거운 일에는 들뜬 마음이 탈 날까봐 속에 무거운 돌을 얹어 감정을 조율하는 버릇이 생겼다. 매사 진중한 마음으로 임하되 무리한 상황이 되지 않도록 놔버려야 할 것은 단호하게 털고 간다.

살다 보면 공들여 준비한 일이 누군가에 의해 무너지거나 힘겹게 이어지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합리적인 상황으로 연결되면 납득이 수월하지만 이해를 구하고도 어려움을 겪게 될 때는 난감함이 최고치에 이른다. 문득 어릴 적 경험을 떠올리면 가족은 평소에 아버지 의견을 존중했기에 분명 사소한 것에 심기가 불편해졌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지난 기억으로 현 상황을 다시 점검하고 사람을 정돈해 무사히 행사를 마쳤다.

뜻하는 바를 잘 이루고 싶은가? 그러면 조바심을 거두고 때론 강력한 놓아버림이 필요하다.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여러 경험과 현명한 판단이 뒤따르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해하기 힘든 어려움이 닥쳤을 때, 때론 놓아버리는 과감한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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