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장마로 인해 비를 보게 되는 날이 많은 요즘이다. 급작스러운 폭우나 기나긴 장맛비처럼 자극적이거나 지치게 하지 않는 그저 가끔씩 찾아오는 차분한 비를 꽤 좋아하는 편인 것 같다. 어둡고 흐린 하늘, 창가에 맺힌 빗방울, 떨어지는 빗소리, 젖은 흙 내음과 같은 비 오는 날의 풍경은 새로운 감각을 깨우고 독특한 감정을 경험하게 한다.
자연의 미묘한 변화와 분위기를 포착해 감정과 이미지를 전달하거나 그 자체의 형상과 속성을 음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는 드뷔시나 라벨과 같은 인상주의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다. 인상주의 음악에서는 다채로운 음색, 모호하고 확장된 화성, 자유로운 리듬과 박자, 전통적인 장단조 체계에서 벗어난 음계와 교회선법의 사용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자연의 소리나 형태를 모방하거나 자연이 주는 심상을 표현한다. 음 하나하나에 응축된 놀라운 미적 에너지와 치밀하고 정교한 묘사력으로 작품에 녹아든 감정과 분위기를 섬세하게 구현했던 미켈란젤리(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1920~1995)는 인상주의 음악에 있어서 단연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있는데 특히 드뷔시의 '프렐류드(Préludes, L.117 & L.123)', '영상(Images, L.110 & L.111)',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Gaspard de la nuit, M.55)' 연주를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자연의 소리나 백색소음처럼 음악도 그런 종류의 것일 수 있다. 완벽한 논리와 위대한 서사로 무장하고 현란한 기교와 과시적 표현을 더한 연주로 기어이 청중을 감동시키고야 말겠다는 그런 부담스러움이 없는, 모든 집중력과 감각을 총동원해 필사적으로 감상하고 해석하며 나름의 의미를 어떻게든 부여하려는 행위를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그저 일상 속 하나의 풍경처럼 주의를 끌지 않고 배경으로서 존재하면서도 은은하게 공간을 채우는 마치 가구와 같은 그런 음악 말이다. 사티(Erik Satie, 1866~1925)는 가구 음악(Musique d'ameublement)이라는 명칭으로 이 새로운 개념을 정의했다. 서정적인 멜로디를 가진 단순하고 반복적인 사티의 음악은 그저 공간 속에 머물며 의식적인 감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의 주변에는 마치 가구처럼 의식하지 않더라도 공간의 배경이 되는 요소들이 있기 마련이다. 인지하지 못하거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도 많지만 이들의 존재는 분명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구 음악처럼 나의 감정과 삶의 공간을 형성하는 느슨하게 연결된 관계들도 돌이켜보면 항상 있었다. 단지 내가 그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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