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문자 메시지 ‘읽씹’ 논란

오철환(전 대구시의원·소설가)
오철환(전 대구시의원·소설가)

문자 메시지 '읽씹' 논란이 화제다. 총선 정국에서 '명품 백' 몰래카메라가 선거판에 악영향을 미치자, 당시 선거를 지휘했던 비대위원장에게 피해당사자인 영부인이 다섯 번에 걸쳐 문자를 보냈으나 그걸 그냥 뭉갰다는 것이다.

본인(김건희 여사)이 못난 탓에 악의적인 함정에 빠져 당을 곤경에 빠트렸으니, 결자해지 차원에서 사과할 용의가 없지 않았을 터. 선거를 총괄하는 비대위원장의 판단을 구하는 취지였다.

사과 여부를 섣불리 혼자 결정하기 어려운 건 지난 대선 당시 과거 잘못을 사과했다가 역풍을 맞은 경험 때문이었다. 사과해서 사태가 수습될 것 같으면 몇 번이라도 사과할 마음이 있지만,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지라, 고심 끝에 비대위원장의 결정에 따르고자 문자를 보낸 것이다.

영부인의 고민과 반응은 유별나지 않고 지극히 상식적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밤잠을 설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고, 그 수습 방안에 대해서도 그와 비슷한 고민을 할 것이다. 자책과 후회,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진정성 있게 묻어나고, 선거에 미칠 예측 불허의 영향으로 인해, 사과하고 싶지만 사과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딱한 사정이 절절히 느껴진다.

그런 문자를 다섯 번이나 씹었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 장삼이사 지인의 문자를 씹어도 상대방은 흥분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20여 년 한솥밥을 먹던 상사이자 현직 대통령의 부인, 개인적으로도 잘 알고 지내던 영부인의 문자를, 대놓고 무려 다섯 번씩이나 뭉갰다는 건, 보통 사람으로선 흉내 낼 수 없는 결례의 극치이고, 영부인의 남편, 대통령에 대한 무례 내지 무시이다.

그 이슈가 총선 정국을 뒤흔들 폭발력 있는 뇌관인 걸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전향적인 방책을 제시한 당사자의 문자를 못 본 척 씹은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나쁘게 보면 이적행위라 비난할 만하다. 항간에서 그를 강남좌파라든가, 고의로 총선을 패하게 만들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에 대해 현 정권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든가, 문자에 답한다면 국정 농단으로 공격당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당원이 당의 비대위원장에게 총선의 핫이슈에 대해 대국민 사과 여부를 묻는 것이 국정 농단인가? 영민한 수재 법조인이 그 정도의 사리 판단을 하지 못할 리 없다.

총선이 끝난 후 영부인과 통화했다는 한 정치평론가는 그 문자 내용과 다른 사실을 밝혔다. 그 당시 통화에서 그 주변의 지인이 사과를 못 하게 말렸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 이른바 친윤이 개입됐다는 뉘앙스를 준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비대위원장의 '읽씹'이 아니라 주변의 반대 때문에 사과를 못 했다는 의미다.

하나, 두 가지 사실을 조화롭게 조합하면 다른 결론이 나온다. 주변에서 사과를 만류하는 분위기라 비대위원장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읽씹'하는 바람에 무산됐다는 가설 또는 비대위원장에게 가부를 결정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답이 없어서 사과하지 말라는 주변 지인의 의견을 수용했다는 가설이다. 그 어느 쪽이든 비대위원장에게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다.

이 논란을 두고 진흙탕 싸움이라고 폄훼할 일은 아니다. 총선 당시 가장 민감한 사안이었고, 그로 인해 승패가 갈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대파값으로 난리 쳤던 일을 상기한다면 이 사안을 가볍게 볼 수 없다. 이는 리더의 인간성과 정무적 감각을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이슈이자 정치인의 자질을 판단하는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안의 자초지종에 귀 기울이고 명쾌한 해명을 듣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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