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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 호모에스테티쿠스] <39>황순원의 ‘소나기’: 어떤 몰락의 미학

이경규 계명대 교수

클립아트 코리아 제공
클립아트 코리아 제공
이경규 계명대 교수.
이경규 계명대 교수.

황순원의 '소나기'는 한국인의 심상에 첫사랑의 원형을 새겨놓은 명작이다. 문학에 대한 첫사랑도 이 단편을 통해 경험한 사람이 많다. 찬연한 가을 서정을 배경으로 소년·소녀의 순정이 아름답고도 애틋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순수와 서정의 글쓰기가 6·25 전쟁 중에(1952년) 수행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흥미롭다. 주인공 소녀의 이른 죽음이 안타깝고 해피엔딩이 아쉽다면 이러한 작품 바깥의 정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전쟁 중에 해피엔딩의 로맨스를 그리는 것은 아무래도 생뚱맞지 않겠는가. 다만 비극이라도 분위기를 아름답게 조성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러니까, '소나기'는 첫사랑의 비극을 지극히 서정적이고 아름답게 장식한다는 데 문학의 묘미가 있다.

주인공 소녀는 몇 대에 걸쳐 마을 유지로 군림해 온 윤 초시네 증손녀다. 황순원이 처음에 소설의 제목을 '소녀'라고 했을 만큼 명실상부한 주인공이다. 원래 서울에 살았으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아버지의 고향 집으로 떠밀려왔다. 두 오빠는 오래전에 죽고 시골집마저 남의 손에 넘어간 상황이다. 가을에 시골로 온 병약한 소녀는(폐결핵) 이 한 철을 못 넘기고 죽는다. 가문의 유일한 핏줄인 소녀의 죽음으로 잘 나가던 윤씨가의 몰락이 확정된다. 이 모습이 마지막 불꽃인 양 아름답게 그려지는데, 주로 소녀의 파트너인 소년의 시선을 통해 그려진다.

"목덜미가 마냥 흰" 서울 소녀를 소년이 처음 대면한 곳은 얼굴이 비치도록 맑은 개울이다. 소녀는 징검다리에 앉아 세수도 하고 물놀이도 한다. 접근도 못 하는 소년에게 소녀가 조약돌 하나를 집어 던지며 사인을 보낸다. "바보"라는 말을 남기고 갈밭을 지나가는 소녀의 머리에 "유난히 맑은 가을 햇살"이 반짝인다. 어느 토요일, 소녀가 개울에서 주운 조개의 이름을 묻고 소년이 "비단조개"라고 답하면서 처음으로 대화가 이뤄진다.

그 후 어느 "쪽빛으로 한껏 갠 가을날" 소녀는 소년의 안내를 받아 시골의 가을을 섭렵한다. 허수아비·메뚜기·원두막·무밭·들국화·도라지꽃,……. "도라지꽃이 이렇게 예쁜 줄은 몰랐네." 소녀는 탄성을 지르며 한 아름 꽃을 꺾어 안는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고 소년은 소녀를 수숫단 속으로 대피시키고 자신은 그 앞에서 비를 맞는다. 꽃향기와 비에 젖은 몸 내음이 뒤섞여 코를 찌른다. 비가 그쳤으나 돌다리가 물에 잠겨 소녀는 소년의 등에 업혀 개울을 건넌다. 물이 소년의 걷어 올린 바지까지 올라오자 소녀는 놀라며 소년의 목을 끌어안는다. 하늘은 다시 쪽빛으로 개이고 집으로 돌아간 소녀는 몸져눕는다.

며칠 뒤에 핼쑥한 얼굴로 나타난 소녀는 분홍 스웨터에 묻은 "검붉은 진흙물" 얼룩을 보여 주며 말한다. 소년의 등에 업혔을 때 생긴 것이라고. 이날의 만남이 소년 소녀의 마지막 데이트다. 소녀는 죽기 전에 말했다고 한다. 자기가 죽거든 반드시 입던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이렇듯 '소나기'는 한 몰락한 가문의 마지막 꽃망울이 피지도 못하고 떨어지는 가슴 아픈 이야기다. 그런데도 가을이라는 도저한 서정과 옷에 생긴 한 자락 흙물 얼룩마저 인연의 증표로 영원히 간직하겠다는 순정이 어우러져 만개한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답다. 몰락의 종막이 이렇게 아름다운 경우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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