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화요초대석] 영웅의 탄생과 그 그림자

김영수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에서 새로운 영웅이 탄생했다. 두 발의 총탄, 한마디의 말, 한 장의 사진이 가슴 웅장한 신화를 만들어냈다. 지난 7월 13일(현지시간), 트럼프 전 대통령은 유세 도중 가까스로 암살을 면했다. 첫 총탄이 가슴에 적중했지만, 방탄복을 입고 있었다. 두 번째 총탄은 오른쪽 귀를 관통했다. 차트를 보려고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면, 머리에 적중했을 것이다. 신의 손길이 그를 지켰다.

하지만 이 비극을 신화로 승화시킨 것은 트럼프 자신이었다. 트럼프는 경호원들의 육탄 방패를 헤치고 일어나, 불끈 쥔 주먹을 하늘 높이 치켜세웠다. 그리고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라고 외쳤다. 오른쪽 귀와 뺨에는 붉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충격과 공포에 질려 웅크렸던 청중도 함께 주먹을 치켜들고 '유-에스-에이(U-S-A)'를 연호했다. 트럼프 뒤로 펼쳐진 푸른 하늘 위에 성조기가 휘날렸다.

리얼리티 TV 방송인이었던 트럼프는 카메라에 단련됐다. 하지만 이번만은 연기가 아닌 본능이 그를 이끌었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와 지지자들의 본능적 연결, 현대 미디어 시대에 대한 숙달을 이보다 완벽하게 보여 주는 순간을 상상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AP통신 기자 에반 부치가 이 '역사에서 시간이 멈춘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했다. 2차대전 때 미군이 이오지마 수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세우는 사진을 연상시킨다. 현대 정치는 이미지가 좌우한다. 미국을 위해 피 흘리는 숭고한 애국의 서사에, 미국민의 가슴은 뜨거워졌다.

트럼프는 미국 정치사에서 예외적 존재다. 91건의 형사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고, 얼마 전 34개 혐의에 대해 유죄 평결을 받았다. 미 전직 대통령이 중범죄 판결을 받은 것은 최초였다. 죄질도 나쁘다. 성인영화 배우와의 성관계를 감추기 위해 뒷돈을 주고, 장부를 조작했다. 또한 백악관 비밀문서를 불법 유출하고, 2020년 대선 결과를 뒤집고자 공모했으며, 2021년 국회의사당을 습격한 1‧6사태를 선동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거짓말도 상습적이다.

하지만 이제 트럼프는 단순히 전직 대통령이나 대선 후보가 아니다. 프랑스혁명에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처럼, 쓰러진 미국을 일으키고자 피 흘리며 싸우는 불굴의 영웅으로 거듭났다. 일론 머스크는 "미국에 이처럼 강인한 후보가 있었던 것은 루스벨트가 마지막"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1912년, 제26대 미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연설 중 피격됐지만, 피를 흘리며 연설을 마쳤다.

사건 직후 트럼프는 "이런 일이 미국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사건은 충분히 예견되었다. 금년 초 저명한 미 싱크탱크 외교협회(CFR)는 미국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요소로 정치 폭력을 꼽았다. 국내의 정치적 양극화를 외국의 침략보다 위험하다고 진단한 것이다.

실제로 2023년 미국민의 23%는 "나라가 너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바로잡기 위해서 진정한 애국자들은 폭력을 택해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찬성했다. 트럼프 자신이 1‧6사태 때 "나라를 되찾기 위해 지옥같이 싸우라"고 부추겼다. 금년 초 슈워츠 미 밴더빌트대 교수는 "당시 테러를 부추겼던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차 유력 주자로 부상한 것은 이번엔 당시보다 더한 폭력 사태가 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예견했다.

전 세계적으로 정치적 폭력성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금년 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을 공격한 범인들의 증오는 '죽이려고' 할 정도로 강력했다. 세계화로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대중의 원한(르상티망)이 커졌다. 한편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분노를 완충시키는 제도가 무력화되며 허들이 무너졌다.

포퓰리스트 정치가들은 넘쳐흐르는 대중의 르상티망에 올라타 권력을 노린다. 민주주의에서는 메시아도, 선한 독재자도 답이 아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가 극단의 대립에 맞서고, 폭력의 벼랑에서 국가를 구해내길 기대해야 할 절박한 상황이다.(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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