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삶에 관한 잔인하고 우아한 탐구

'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 한겨레출판 펴냄  

영화평론가 백정우

삶에 관하여 지적이면서도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메스를 들이대는 작가 이언 매큐언의 13번째 장편소설. 영국의 아동법(children act.) 제1조 (a)항으로 시작하는 '칠드런 액트'는 과학과 종교, 합리적 사고와 맹신 사이를 종횡하며 도덕과 종교의 미묘한 가치판단에 관해 묻는다.

제도와 규범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온 불완전한 인간이 품은 도덕적 딜레마라는, 이언 매큐언 소설이 다루는 공통적 주제는 '칠드런 액트'에서도 여전하다. 작가는 시작부터 집안 구석구석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ㅡ"벽난로 옆에 놓인 매립형 책장 일부분과 벽 한쪽의 커다란 창문가에 걸린 르누아르의 '목욕하는 여인' 판화. 삼십 년 전에 오십 파운드를 주고 구입한 아마도 가짜일 듯싶은 작품"(7쪽)ㅡ그러니까 피오나 메이 판사의 감각과 취향과 행동양식까지 패를 다 펼쳐놓고는 이야기를 전개한다.

우아하고 지적인 고등법원 판사 피오나 메이 앞에 닥친 몇 개의 재판. 샴쌍둥이 분리 수술과 양육권 판결로 고심할 때 느닷없는 남편의 외도 선언이 이어지고, 여호와의 증인 환자 애덤의 수혈 거부에 따른 병원의 수혈 명령 청구가 날아든다. 작가는 치밀하고 합리적이고 노련한 판사의 법리적 판단을 어린 생명을 구하려는 인간적 연민으로 교란시키며 이야기를 격랑으로 끌고 가는데.

솜씨 좋은 요리사가 만든 일품요리처럼 작가는 사생활의 감정혼란을 억누르는 피오나의 직업윤리를 소설 곳곳에 드러낸다. 예컨대 샴쌍둥이 판결문 도입부에서 "본 법정은 도덕이 아니라 법을 다루는 장소"(42쪽)라 말하고, 여호와의 증인 수혈거부와 관련하여 "그녀의 직무 혹은 사명은 아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합리적이고 합법적인지를 판단하는 것이었다."(53쪽)고 말한다. 결국 병원을 방문해 애덤의 상태를 확인한 피오나의 판결문은 이언 매큐언의 차가운 이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명문이다. "바로 이 힘 때문에 저는 멈춰 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A는 17세가 되도록 종교적, 철학적 사고라는 격변하는 영역에서 다른 표본을 접해본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이하 생략)"(168쪽)

나는 이 판결문 대목에서 모노크롬의 미학을 보여준 두 편의 영화를 떠올렸다.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의 '이다'는 서원을 앞두고 얻은 외출기간 동안 세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으나 우연히 만난 재즈뮤지션과 욕망의 밤을 보낸 후 수녀원으로 발길을 돌리는 이다를 통해 믿음의 실체를 탐색한다. 독일과 소련군의 연이은 폭력에 의해 임신한 수녀 중 일부가 수치심과 순결서약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목숨을 끊는 비극적 상황을 그린 '아뉴스데이'에서 보좌수녀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그나마 나는 다행이에요, 밖에서 남자를 알았으니까" 영화 마지막까지 중심을 지키는 것 역시 그녀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일찌감치 체득한 세속에의 매혹과 욕망을 버리고 금욕의 세계로 향하는 믿음은 얼마나 위대한가! 그러하기에 맹신은 진짜 믿음이 아니다. 진짜 위대한 믿음은 알거 다 알면서 대상을 믿는 것. 가져보지 않고 버리는 건 버리는 것이 아님을, 삼키는 것 없는 침묵은 침묵이 아님을(…)

소설은 타자의 도움으로 맹신에서 벗어나지만, 새로운 맹신 대상에 집착함으로써 빚어낸 파국을 보여준다. 피오나의 판결은 판사로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합리적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이언 매큐언은 제도와 법이 책임질 수 없는 영역에 관하여, 단호한 지성이 범할 수 있는 실수들까지 살피고자 한다. '칠드런 액트'가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일 것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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