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가장 아팠던 한국 역사 반세기, 여덟 가지 모습으로 살아남은 여성

[책]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정해영 번역/위즈덤하우스 펴냄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책 표지

"어르신의 인생을 세 단어로 요약해 주시겠어요?"

황혼요양원에서 근무하는 소설의 관찰자인 요양사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본인의 장례 준비에 참여하면서 상태가 호전됐다는 기사를 접한 뒤, 요양원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부고 쓰기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그녀는 어르신을 정의내리거나 그의 인생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세개씩 골라달라고 말한다. 그녀가 '세 가지 개념'에 집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3은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마법의 숫자다. 한 단어는 너무 제한적이고, 둘은 마치 이중생활을 암시하는 것처럼 뭔가 꺼림칙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셋은 삼두정치와 3부작, 삼위일체에서처럼 완벽한 균형을 암시한다. 사람들은 너무 작지도 너무 크지도 않은 3이라는 숫자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본문 17쪽)

그런 그녀가 요양원의 치매 환자 구역의 흙을 먹는 걸로 악명 높은 노인, '묵 할머니'를 만난다. 이 책은 세 개의 단어는 너무 적다며 당신의 인생을 여덟 개의 단어로 나열하는 한 노인의 이야기다. 노예, 탈출 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어머니. "일곱 단어인데요. 여덟이 아니에요" 요양사가 되묻자, 묵 할머니는 비어 있는 하나의 숫자를 채우기 위한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설은 책의 제목처럼 총 여덟 가지 인생의 장막으로 구성돼있다. 이 여덟 개의 챕터는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뒤섞인 채로 진행되면서 묵 할머니가 가진 세 개의 국적과,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 바꿀 수밖에 없었던 여덟 가지 정체에 관해 고백해 나간다.

일제강점기 평양 근처의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주인공은 어렸을 때부터 종종 흙을 먹으며 묘한 해방감을 느끼곤 했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폭행을 견디며 지낸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 뿐만이 아니라 어머니가 영어 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때려 눈을 멀게 만든다. "그 순간, 내가 내 죄의 색에 직면한 바로 그 순간이 내가 흙 먹는 것을 멈춘 때였다" (본문 80쪽) 주인공이 모녀의 고통을 끊기 위해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르면서, 그녀의 인생을 묘사하는 여덟 단어 중 하나인 '살인자'의 퍼즐이 맞춰진다.

이후 주인공은 어머니의 눈을 고쳐주겠단 말에 속아 인도네시아 스마랑의 위안소로 끌려간다. 미군의 개입으로 탈출했지만 이내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미군 부대 근처인 낙검자 수용소인 멍키하우스에서 남장한 채로 일하게 된다. 그곳의 여성들을 탈출시키고 하우스를 불태우면서 '탈출 전문가', '테러리스트' 나머지 단어들이 하나둘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지만, 이념 갈등에 휘말리면서 공작원이 되어 보통의 삶과 멀어지게 된다.

'먹는 것이 곧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묵 할머니는 그녀가 가본 다양한 장소의 흙을 맛보고 삼켰다. 그러니 그녀는 여러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여러 장소의 흙이 만든 인물이다. (본문 402쪽)

이처럼 소설은 일제강점기, 해방을 지나 느닷없이 들이닥친 전쟁, 분단의 아픔을 거치면서 작고 연약한 소녀가 살아남아 어른이 되는 과정을 대담하게 그려낸다. 한국 역사 속 가장 아팠던 한 세기 동안 변두리로 밀려난 여성들을 피해자로 기록하기 보단 사기꾼이자 살인자가 되고 테러리스트이자 스파이로서 무대에 세운다.

저자는 최고령 탈북자 중 한명이자 저자의 이모할머니인 고(故) 김병녀 님의 인생에서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완성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20대 초반까지 자란 저자는 홍콩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영어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그녀가 영어로 집필한 첫 장편소설로 미국 대형 출판사 하퍼콜린스와 억대 선인세 계약을 맺으며 영미권 출판 시장에 진출했다. 이후 한국인 최초로 영국 여성문학상 노미네이트, 세계 10여 개국에 연이어 번역 출간이 확정되는 등 한국인만이 쓸 수 있는 'K-문학'으로 그 지평을 넓히고 있다. 408쪽, 1만8천800원.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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