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각과 전망] 탄핵 난사(亂射), 이런다고 이재명 세상 오겠나

최경철 편집국 부국장 겸 동부지역 취재본부장
최경철 편집국 부국장 겸 동부지역 취재본부장

2003년 2월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 민정수석이 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04년 2월 12일 물러났다. 그는 같은 달 28일 히말라야를 오르기 위해 네팔 카트만두로 떠났다. 외부 연락을 끊고자 휴대전화도 두고 갔다. 문 전 대통령은 현지 호텔에서 아침 식사 도중 영자 신문을 보다 'South Korea President Roh'라는 제목의 헤드라인을 발견했다. 제목 끝에는 'impeached'라고 돼 있었다. 사법시험 차석을 했을 만큼 명석한 그였지만 이 단어는 뜻이 떠오르지 않았다. 'impeached'는 '탄핵(彈劾)당하다'라는 뜻인데 한글·한자로도 좀처럼 쓰지 않는 단어가 영어로 나왔으니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문 전 대통령이 쓴 책 '운명'에 나오는 이야기다. 문 전 대통령 스스로 "모르는 단어"라고 했던 고백처럼 '탄핵'은 결코 일상 용어가 아니며 절대 상용 단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문 전 대통령이 몸담았던 거대 야당은 그 의미가 매우 무겁고 엄중해 장식장 속에 모셔둬야 할 단어를 함부로 꺼내 들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파면을 이끌어낸 뒤 집권했던 더불어민주당은 야당이 되더니 최근 잇따른 탄핵 청원 청문회를 열면서 윤석열 대통령을 탄핵 대상으로 정조준하는 모습이 목격된다. 그뿐만 아니다. 2022년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지금까지 모두 13건의 탄핵을 시도했다. 이 중 6건은 22대 국회 들어 두 달 안에 이뤄졌다. 이재명 전 대표 사건 수사 담당 검사 등 검사 4명에 대한 탄핵안도 여기에 포함됐다. 170석의 압도적 국회 다수당인 민주당은 헌정사(憲政史)에 전례 없는 '기관장 직무대행' 탄핵을 추진하는 등 방송통신위원회 대상 탄핵소추만 벌써 세 번째 발의했다. 이 탄핵으로 인해 방통위는 단 한 명의 위원도 남지 않는 초유의 사태까지 맞았다.

탄핵소추권은 행정부·사법부에 대한 헌법상 국회의 통제(統制) 권한이다. 고위 공직자의 헌법 침해 및 법률 위반으로부터 헌법을 수호(守護), 궁극적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든든하게 지켜내고자 함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몹시 파괴적이어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오기에 제도로 실행할 때는 신중과 절제가 필요하다. 국회가 탄핵소추권을 행사하면 피소추자의 권한 행사가 그때마다 정지된다. 탄핵이 잦으면 행정부와 사법부의 기관 업무가 무력화돼 국민 기본권이 보장되지 못하는 지대한 피해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대통령은 전국 단위 선거에서 선출되는 유일한 정무직 공무원으로 민주적 정당성을 갖고 있으며 헌법상 5년의 임기까지 보장받는데 탄핵을 입에 올린다는 것은 선거 결과의 효력이 부인된다는 점에서 내전에 가까운 심각한 국론 분열을 가져온다. 마구잡이 탄핵이 쏟아지면 헌법이 보장하는 직업공무원 제도 역시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 공무원들은 국민이 아닌 국회 다수당만 바라보며 업무에 임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까지 입에 올려지고 있는 최근의 탄핵 시도는 3권분립을 형해화(形骸化)해 견제 없는 국회 권력을 만들 것이다. 탄핵 난사는 무소불위의 국회 다수당 권력을 만들어 당내에서 이미 절대적 위치에 올라 있는 이재명 전 대표의 대선 고속도로를 깔아 보려 한다는 게 다수 국민들이 갖는 합리적 의심이다. 똑똑한 우리 국민이 이를 방관할 것이라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우리 헌정사는 어느 누구든 전제정(專制政)으로 의심되면 철퇴를 가해 왔다는 것을 잊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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