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망징패조(亡徵敗兆)의 수순

김태진 논설위원
김태진 논설위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동북아 질서 재편의 큰 전란을 겪은 뒤였음에도 조선의 국방은 허술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국가의 방비(防備)는 엉망에 가까웠는데 군사훈련에서 이런 면이 크게 드러났다. 군사훈련은 봄가을 연 2회 실시했지만 북벌을 주장하던 정조가 1800년 사망한 이후 60년 동안 이렇다 할 훈련 따위는 없었다. 그런 마당에 당시 정보기관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비변사(備邊司)는 새삼스레 군사훈련을 실시하면 민심만 소란해진다며 훈련 중지를 건의하기까지 했다.

고종 3년, 1866년 임무록(壬戊錄)에는 경상감사 이참현이 창고지기(庫吏)의 말을 인용해 군기고(軍器庫)의 상황을 보고한 것이 실렸다. 보고 내용은 이랬다. "대구(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가 맞다)의 군기는 반은 가산에 있고 나머지는 역내의 군기고에 있는데 군기고를 열어 점검해 보려 하니 고리가 하는 말이 '이 창고를 열지 않은 지가 60년이 넘습니다. 이제 만약 열어 본다면 먼지뿐일 것이며 해마다 이에 대한 사무 인계는 오직 문서로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한다."

문서로만 인계된 군기고를 60년 만에 점검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200년 넘도록 지배 세력은 평화에 취해 '안보관'이라는 말을 붙여 논하기 민망할 정도로 개념이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조선이 문서로 군기고 점검을 하던 때와 비슷한 시기인 1868년 일본은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며 메이지유신을 단행한다. 이로부터 37년 뒤 조선은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된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궤멸(潰滅)하고 영국이 제해(制海)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일등 공신 중 하나로 프랜시스 월싱엄을 꼽는 데 이견이 없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첩보대장이었다. 1500년대 영국이 국가를 방어하는 가장 가성비 높은 방식은 첩보 활동이었다. 월싱엄이 파리에 대사로 파견됐을 때 그는 재정적으로 거의 파산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을 초대해 환심을 사는 것도 일이었지만 많은 첩보원의 비용을 직접 지불했던 탓이었다. 월싱엄의 좌우명은 "지식에 지불하는 돈은 결코 비싸지 않다"였다고 한다. 적의 공모나 연맹, 전쟁 준비를 초기에 알아내야 약자의 정치가 가능했던 것이다.

국군정보사령부 해외 요원의 신상을 비롯한 기밀 정보들이 북한으로 넘어간 정황이 발견됐다고 한다. 국군정보사령부의 군무원 노트북을 통해 최대 수천 건의 정보가 유출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첩보전의 최전선에서 신분을 숨기고 암약(暗躍)하는 이들이다. 대한민국에 정보를 넘겨준 북측 인사들의 경우 발각되면, 곤란한 상황에 빠지는 정도가 아닌, 생사까지 갈리게 된다. 설상가상 공들여 구축한 첩보망이 단박에 무너지는 것이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중차대한 작업임에도 소홀하게 방치한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기강(紀綱)이 땅에 떨어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탄핵이 스포츠 용어처럼 쓰이고 정치가 실종된 현 정치 상황은 '망징패조(亡徵敗兆)'로 읽기에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아니다. 망조라 말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때는 기강이 무너질 때다. 신상을 팔아넘기고, 작전 계획을 팔아넘기며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도모한다.

매국(賣國)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엄하게 다스려야 함은 물론이고 총체적인 재점검도 따라야 할 것이다. 국가의 존폐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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