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의 발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장어. 삼복 염천 아래, 저놈으로 더위를 날리려는 미식가들이 폭증하고 있다. 장어는 4종류. 가장 대중적으로 확산된 건 단연 '민물장어(뱀장어/우나기)'이다. 그럼, 한국 장어의 맏형격인 '풍천장어' 속으로 들어가 보자.
◆풍천장어
민물장어의 대명사인 풍천장어. 바다에서 살다가 마지막에는 모천회귀를 위해 강으로 돌아온다. 뱀처럼 생겨 '뱀장어'로도 부른다. 판소리를 채집해 정리한 고창 출신 신재효의 기록에도 용왕의 폐결핵 치료법으로 풍천장어가 등장하기도 한다. 2002년 이상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권지예의 '뱀장어 스튜'는 피카소의 동명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 우리나라만 장어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축구 스타 베컴은 보양식으로 장어젤리를 즐긴다. 네덜란드에는 훈제장어인 '흐로크트 팔링', 독일 함부르크에서는 장어수프인 '알주페'가 유명하다.
그건 그렇고, '풍천'(風川)은 과연 어딜까? 우리나라의 강이나 큰 하천들은 백두대간을 경계로 동쪽 지방에서는 서에서 발원해 동으로 흐른다. 그런데 서쪽 지방에서는 동에서 발원해 서로 흐른다. 그러나 고창군 심원면 선운사 도솔암 서쪽에서 발원해 동백꽃으로 유명한 선운사 앞을 거쳐 서해로 빠지는 하천인 '인천강', 이 강은 서에서 발원해 북향했다가 다시 서해로 흐르는 '서출동류'(西出東流) 스타일. 이렇게 동출서류의 자연현상을 거역하고 역류하는 하천을 풍수학에서는 '풍천'이라 한다. 풍천은 낮에는 해풍이 밤에는 육풍이 서로 교차하는, 해양학에서 말하는 '기수역'이다. 모천회귀의 본능이 강한 뱀장어의 치어들이 찾아와 성어로 자라는 서식처. 보통 바다가 밀물로 몰려올 때 육지로 바람을 몰고 오는데 이때 나타나는 장어를 풍천장어라 한다.
◆고창은 풍천장어 1번지
국내 뱀장어 양식은 강으로 거슬러 오는 실뱀장어를 잡아다가 키우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뱀장어 양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실뱀장어 확보. 인공으로 실뱀장어를 생산할 수 없는 상황인 탓이다. 그래서 태평양에서 올라온 실뱀장어를 확보하지 않고는 뱀장어 양식을 할 수 없다. 강에 댐과 수중보, 하구언 등이 만들어지면서 강과 하천에서 성어를 만나는 일이 쉽지 않다. 대신에 강 하구로 찾아온 어린 뱀장어를 포획해 양만장에서 1년 이상 키워서 식탁에 올린다. 당연히 양식용 실뱀장어는 무척 귀하다. 5~7㎝ 길이의 작은 실뱀장어 1마리당 가격이 귀할 때는 2만 원까지 치솟는다.
고창에는 뱀장어 양식장이 85곳에 이른다. 전국 최강이다. 전국에 공급하는 뱀장어의 30% 정도다. 장어 전문식당은 33개소. 고창이 풍천장어의 고향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요즘 지역에서도 풍천이란 단어가 들어간 장어식당이 늘어나고 있다. 대구에도 장어 마니아가 적잖다. 삼수와 남강장어가 중심을 잡고 있다. 그리고 후발주자로 앞산순환도로 상에 있는 원대덕골, 그리고 가창면 옥분리 유자 먹인 장어(현재는 폐업), 장어촌의 경우 40여 년 역사를 가진 달성군 하빈면 하목정 옆과 칠성시장 내 장어촌이 꽤 유명하다. 하빈 장어촌의 경우 지금은 3곳(대구, 강창, 대성)만 남았다.
부산 낙동강권에도 장어 전통이 깊게 박혀 있다. 김해 서낙동강 장어 때문이다. 현재 김해의 중심 강이면서 한때는 낙동강의 본류였던 곳이다. 김해 선암다리 양옆 천변으로는 30여 곳의 장어구이 집이 자리 잡을 정도였다. 이제는 고창이나 김해나 실뱀장어로 양식한 장어로 조리하기에 자연산 장어의 맛은 더 이상 보기가 어려워졌다는 게 부산 토속음식연구가인 최원준 시인의 전언이다.
◆일본의 장어문화
일본 민물장어 음식의 역사는 꽤 길다. 1700년대 후반 에도 시대 때부터 먹어온 모양이다. 일본에는 '도요노 우시노히(땅의 기운이 왕성한 절기. 일 년에 4번 돌아옴)'라는 절기가 있다. 그중 여름 절기가 우리의 삼복에 해당된다. 해마다 세계에서 유통되는 민물장어의 70% 이상을 일본인이 소비한다는 통계만 보아도 쉬 알 수가 있겠다.
주로 민물장어를 구워서 밥 위에 올려서 먹는 '장어덮밥'이 대표격. 민물장어를 칼로 넓게 펼친 뒤 꼬치에 꿰어 양념을 바르고 숯불에 구워낸다. 구워낸 장어를 밥 위에 올려 덮밥으로 먹는다.
일본의 장어덮밥은 크게 나누어 '돈부리바치'라는 사발에 장어를 담아내는 '우나기동'과 사각형 칠기 찬합에 올려내는 '우나쥬', '오히츠'라는 나무 밥통에 담아서 내는 '히츠마부시'가 있다.
국내의 경우 로스구이가 가장 대중적이고 접대형 업소에서는 간장과 양념 두 가지를 주방에서 다 구워낸 방식이다.
◆기장 학리 붕장어말미잘탕
이번 장어기행의 마지막 행선지는 기장군 학리에서 만난 붕장어말미잘탕(이하 붕말탕) 포차촌. 민어탕이 목포시민의 복달임 음식이듯 기장군에서는 타 도시에서는 맛 볼 수 없는 붕말탕으로 더위를 물리친다.
기장군은 미역과 멸치뿐만 아니라 붕장어 요리의 특구이기도 하다. 월전은 '붕장어 구이', 칠암은 '붕장어 튀밥회', 학리는 붕말탕으로 유명하다. 한 식재료를 세 가지 방식으로 취급을 하고 모두 먹거리촌을 형성한 데는 오직 기장뿐.
말미잘, 그 어원이 무척 재밌다. 일반적으로 접두사 '말'은 '큰'이란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미잘'은 '미주알'의 준말. 따라서 말미잘은 '큰 미주알'이란 의미다. 기장에서는 이 말미잘을 '몰심'이라고도 한다. 몰심, 그건 '말의 암컷 성기'를 일컫는다. 수중에서는 꽃처럼 활짝 피지만 뭍으로 나오면 멍게처럼 잔뜩 웅크린다.
다른 도시에서는 절대 맛 볼 수 없는 별미. 여름철 기장에서 '십전대보탕' '신랑각시탕' 등으로 불리는 보양식이다. 맛은 해물탕과 매운탕의 절충 같다.
◆학리 붕말탕 포차촌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부산만의 보양식인 붕말탕. 일단 말미잘을 탕으로 끓여 먹을 수 있다는 게 흥미롭다. 붕장어는 어떻게 말미잘과 한 몸이 될 수 있었을까?
붕말탕을 업계에서 처음 선보인 사람은 일광면 칠암리 문오성 회타운 끄트머리에 있는 식당인 '부자집'의 사장 조성의 씨.
50년 전 처음으로 돈을 벌 요량으로 앞뒤 안 살피고 칠암리 칠암방파제에서 포장마차촌부터 차렸다. 어부였던 남편은 나룻배를 이용해 복어류를 잡아 왔다. 처음에는 애를 넣어 새로운 버전의 복국을 끓였다. 기장에서 복국 잘 끓이는 아줌마로 알려진다.
남편의 낚시질에 성가신 말미잘이 곧잘 딸려 올라왔다. 아귀·물곰처럼 흉측하게 생겨 처음에는 재수 없다 싶어 몽땅 버렸다.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말미잘 맛이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런 어느 날 물메기탕을 요리할 때 말미잘을 넣고 끓여봤다. 단골들이 '이게 무슨 맛이냐'면서 다들 엄지척. 붕장어와 말미잘은 환상의 궁합이었다. 붕장어는 기름기가 엄청 많은 대신 말미잘은 기름기가 거의 없어 상호 '보완재'가 될 수 있었다.
학리는 이제 '말미잘 고향'으로 유명하다. 한창때는 30여 척, 지금은 출하량이 적어 10척 정도의 배가 출어를 한다. 1시간여 되는 수역에서 '주낙' 어법으로 말미잘을 잡는다. 이때 붕장어도 함께 잡혀 올라온다.
학리 해녀촌 선창가. 여기는 해녀집, 딸부잣집, 현이네 등 붕말탕 전문 포장마차 10곳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멍게, 전복, 소라, 붕장어, 해삼 등도 함께 판다. 뻔한 모듬 해산물에서 살짝 벗어난 '별미특구'라 할 수 있다.
◆붕말탕의 맛 해부
맛의 중심 잡기가 어렵다. 매운탕이라고 여겨 고추장부터 넣으면 절대 안 된다. 감미로운 맛을 내기 위해 양파, 그리고 고춧가루를 적절하게 섞어 넣어야 국물이 텁텁해지지 않는다. 보통 집된장을 듬뿍 넣으면 맛있을 것 같은 데 이 말미잘탕에는 공장표(?) 된장이 더 낫다. 대구에선 재핏가루, 기장 쪽에선 방아잎을 선호한다.
큰 말미잘은 수육, 작은 건 매운탕이 어울린다. 미식가는 구이 스타일을 즐긴다. 하지만 식감은 역시 탕이 제일이다. 차돌박이, 흑돼지 삼겹살, 잘 구워낸 곰장어구이와 해삼, 그런 류의 씹힘성을 다 갖고 있다. 꼬들꼬들·쫄깃쫄깃·오돌도돌의 중간 식감이랄까.
참고로 근처 칠암 붕장어마을 붕장어회는 '고봉밥'처럼 수북하게 담는다. 그리고 부산, 창원, 통영권에서는 유달리 장어로 추어탕처럼 '장어시락국'을 즐긴다. 통영에서는 더 진국인 '통장어탕'이 인기인데 붕말탕 못잖게 명불허전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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