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시윤의 역사답사기행 ,잃어버린 땅 만주‧간도를 가다] 봉오동전투, 북간도의 영웅들

"그날 최진동·홍범도·무명의 독립군은 봉오골에 모였다"
中 봉오동 두만강 얼면 朝 이동 용이한 곳…북간도 대부호 최씨 형제 봉오골 땅 매입
독립군 뒷바라지 위해 병영과 학교 세워

1922년 1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한 최진동 장군(오른쪽)과 홍범도 장군
1922년 1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한 최진동 장군(오른쪽)과 홍범도 장군

봉오저수지 입구 문이 굳게 닫혀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봉오동전투 승전 기념비가 있다.
봉오저수지 입구 문이 굳게 닫혀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봉오동전투 승전 기념비가 있다.

"불은 이미 붙었도다… 이 불은 한반도 산하를 애국의 열혈로 태우고"

-상해 《독립신문》 1920년 2월 17일 자-

낯익은 길이다. 목적한 곳에 끝내 다다르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온 것이다. 땅이 부르면 그저 몸뚱이 앞세워 부름에 응하는 것이 걷는 자의 몫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봉오저수지 문은 오늘도 열리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면 봉오동전투 승전 기념비가 있다는데 우리의 걸음은 여기까지다. 1980년대, 봉오골의 하촌 일대에 댐이 건설되었다. 여기서부터 10여 Km에 우리가 다다르고자하는 땅과 누군가 열혈로 지켜낸 그날이 있다고 했다.

◆한반도의 아우성 3·1운동

1905년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2년 뒤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조선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제에 맞섰다. 누구는 호미와 곡괭이를 들고, 누구는 글로, 누구는 노래로, 또 누구는 자결로 항거했다. 일제는 조선인 부랑배와 건달들을 헌병 보조원으로 모집하여 의병과 민간인, 양민을 학살하며 남한대토벌을 자행했다. 1910년 8월, 국권마저 빼앗은 일제의 무단통치, 강압통치는 더욱 심해졌다. 1919년 3월 1일, 기본권마저 행사할 수 없었던 조선인들은 비폭력으로 항거하며 3·1 운동을 일으켰다.

봉오동 전투(우측 상단) 및 청산리 전투(좌측 하단) 관련 지도. 두산백과
봉오동 전투(우측 상단) 및 청산리 전투(좌측 하단) 관련 지도. 두산백과

◆봉오골 전투의 시발이 된 온성작전

독립군은 일본의 통제를 벗어나 만주와 연해주에서 싸울 준비를 했다. 3·1 운동 소식을 들은 독립군은 다시 한번 결의를 다졌다. 북간도에 근거지를 마련한 독립군은 두만강을 주시했다. 강이 얼면 국내로 잠입하리라 계획했다. 온성이 적합했다. 온성은 중국과 마주하고 있어 치고 빠지기에 그만이었다.

함경북도 온성, 회령, 종성 출신 대원들은 지리에 능통했다. 강이 얼자 독립군은 암암리에 두만강을 건너가 자금을 마련해 돌아오곤 했다. 온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경찰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1920년 3월 중순, 봉오골에 머물던 독립군 대장 최진동이 200여 명의 군무도독부 단원들을 이끌고 비밀리에 움직였다. 깜깜한 밤 산간 샛길을 이용해 두만강을 건너 온성군 유포면 풍리동으로 진격해 일본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했다. 3일 뒤 새벽, 양하청은 대원 50여 명과 함께 온성 미포면 장덕동과 월성동, 풍교동을 덮쳤다.

날이 밝자 미산 헌병감시소를 습격하고 사라졌다. 당일 오전 최진동은 직접 유포면 향당동을 기습했다. 뒤이어 30여 명의 독립군이 풍서동을 덮쳤다. 최진동은 몇몇 집을 급습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일제는 비상이 걸렸다. 함경북도 제3부장(경찰부장) 소속 경찰과 종성에 주둔하던 일본군 1개 중대가 급파됐지만 독립군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같은 날 저녁, 독립군 200여 명이 양수천자 부근에서 다시 두만강을 건너려 했다. 일제는 온성과 두만강 주변에 대규모 병력을 증원했다. 그러나 독립군은 다시 남양동 헌병감시소를 향해 사격했다.

◆봉오골의 장군 최진동과 형제들

일제는 독립군 수령이 최진동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중국 측에 체포를 요구했다. 매번 관망만 할 뿐 미온적이던 중국은 마지못해 간도 일본 총영사관 일경과 함께 봉오골 최진동의 집을 습격했다. 최진동과 식솔들은 없고, 행방에 대해 입을 여는 이도 없었다.

5월,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안무의 '국민회 군무위원회'의 연합으로 '대한북로독군부'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홍범도가 합류하여 대한북로독군부 산하 '북로정일제1군사령부'로 개편되었다. 신민단과 의군부, 러시아 지역 무장단체들도 봉오골로 와 군사교육을 받았다.

대규모 독립군이 봉오골에 집결했다. 싸울 준비를 했다. 당시 북간도의 대부호로 불리던 최진동은 동생 최운산, 최치흥과 함께 재산을 열어 독립군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이미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봉오골 일대의 토지를 거의 사들였던 형제들이었다. 밀림의 나무를 베고 병영을 지었다. 상촌엔 조선인 봉오동사림학교를, 중촌엔 공립제3학교를 두어 교육에도 힘썼다.

군무도독부를 조직하고 무기를 사들이는 한편 장정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 전쟁 경험이 풍부한 러시아, 중국 장교들을 초빙해 훈련하며 전투력을 강화했다. 부녀자들은 밥을 하고 밤새 재봉틀을 돌려 군복을 지었다. 모두가 한뜻이었다. 중국 관헌들과도 절친한 최진동이었으므로 누구도 봉오골에 대해 관여하지 않았다.

영화 봉오동전투
영화 봉오동전투

◆봉오골의 장군 홍범도

홍범도는 산포수로 생계를 유지하다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시행할 때 산포수들과 봉기했다. 사냥꾼의 총을 빼앗은 일본군을 습격하여 총을 탈취한 후 다시 사냥꾼에게 나누어 주었다. '날으는 홍범도'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일제의 고문으로 아내가 죽고, 뒤이어 큰아들마저 전사했다.

비통함에 빠진 홍범도는 더 이상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대한독립군을 조직하고 많은 전장을 누볐다.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통합하여 대학북로독군부를 조직하면서 봉오골을 근거지로 홍범도의 전술은 더욱 세밀하고 담대해졌다. 후치령전투, 갑산읍 점령 등 실질적 전투력으로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한 막강한 부대였다.

2018년 10월 중국 투먼(圖們)시에 새로 건립된 봉오동 전투 기념비
2018년 10월 중국 투먼(圖們)시에 새로 건립된 봉오동 전투 기념비

◆삼둔자(새볼·간평)에 울린 첫 총성

1920년 6월, 신민단원이 강양의 일본군 보초막을 습격했다. 일제는 군대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넜다. 국경을 넘어 중국 경내로 진입한 것이었다.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신식 무기로 무장한 월강추격대를 조직하고 있던 일제는, 독립군을 쫓아 일광산 아래 삼둔자마을을 덮쳐 양민을 학살했다.

급보를 접한 최진동과 홍범도는 발 빠른 대원들을 급파해 일부는 삼둔자 서남방 수풀에 매복하게 하고, 일부는 마을로 가 적군을 수풀로 유인하도록 했다. 독립군을 바짝 추격하던 일제가 수풀에 다다르자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일제를 향해 사격했다.

봉오동전투지라고 알려진
봉오동전투지라고 알려진 '봉오저수지'. 실제 전투지는 10km 상류에 있다. (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봉오골로 유인하라

일본군 몇이 죽었다. 약이 오른 남양수비대와 월강추격대는 고려령을 지나 봉오골로 달아나는 독립군을 멈추지 않고 추격했다. 오후 1시경, 의심 없이 상촌까지 치고 들어왔다. 척후병의 기척조차 없는 비어있는 마을로 일본군 무리가 모두 들어왔다. 그때였다. 봉우리마다 매복하고 있던 독립연합군은 일제히 총과 포를 쏘았다.

신민단은 봉오골 동쪽 산 입구 봉우리에, 의군부 부대는 서쪽 하단 고지에 있었다. 최진동은 부관 안무와 함께 동북산 서쪽 사이 최고봉 아래에서 전투를 치렀다. 서북방 고지는 대부분이 산포수로 구성된 홍범도 장군의 막강한 부대가 맡았다.

봉오골은 백두산의 지맥으로 고려령의 험한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마치 갓을 뒤집어 놓은 듯했다. 주변에 심산 밀림이 있어 유사시 몸을 숨기기에도 유리했다. 유인작전에 휘말린 것을 안 일제는 급히 퇴각했다. 정규군으로 구성되어 기관총 등 최신 무기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독립군의 공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1920년 6월 7일, 봉오골에서 이루어낸 전투는 아시아 최강이었던 일본군에 맞서 싸운 첫 승리였다. 봉오골의 승리는 기적이 아닌 준비된 승리였다.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이름 모를 대원들의 굳은 결의와 열혈의 결과였다. 어떤 주역보다 수천, 수만 명이 독립운동을 위해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이 되었고, 그들이 모두 힘을 합쳐 이룬 승리였다.

한 줄 바람이 봉오골을 스치고 불어온다. 밥 짓는 냄새, 재봉틀 소리, 군사들의 함성이 들린다. 먼발치에서나마 땅이 전하는 말씀을 듣는다. 골짜기를 스치고 온 말씀을 흘려듣지 않고 기록하는 일, 그것이 우리의 몫이라는 걸 잊지 않는다.

박시윤 답사기행 에세이 작가
박시윤 답사기행 에세이 작가

박시윤 답사기행 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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