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골목, 풍경의 정겨움을 더하는 사물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푸른색 플라스틱 화분도 그 중 하나. 때로는 예쁜 식물, 식용 채소가 심겨져 집집마다의 아이콘이 되기도 하고, 혹은 떠나간 이들을 미처 따라가지 못한 채 덩그러니 남겨진 흔한 화분들 말이다.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허태원 작가의 눈에 이 푸른색 화분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은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꿰뚫는 의미심장한 오브제로 비춰졌다. 끊임없이 이주하는 과정에서도 정착하고자 하는 욕망이 담긴 대상이자, 빡빡한 콘크리트 도시 속 생명에 대한 그리움을 대체하는 매개라는 것.
"이제 푸른색 화분은 제조 과정에서 발암물질이 발생한다는 이유로 더 이상 생산되지 않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화분들이 마지막인 셈이죠. 한편으로 푸른색 화분이 조선시대에 실용적이고 흔하게 쓰였던 백자, 청자처럼 시간이 흐르고 난 뒤 한 시대를 보여주는 독특한 물건이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앞서 삭막한 도시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사람들과의 소통을 늘리고자, 2011년부터 7년간 대구 동구 신천동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이웃들과 함께 꽃을 심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작가는 최근 화분 자체에 좀 더 집중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재건축 등으로 대규모 이주가 진행되며 수많은 화분들이 한꺼번에 버려지는 풍경은 나에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며 "그러다 화분의 푸른색에 주목하게 됐다. 햇빛과 비바람에 벗겨지고, 옮겨지며 긁힌 색 속에는 깊은 시간들이 묻어 있다. 화분이 가진 다양한 푸른색과 질감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 이유"라고 말했다.
전시장에 놓여진 선반 위에는 어느 것 하나 같은 모습이 없는 푸른색 화분들과 푸른 이미지의 사진, 회화 작품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특히 사전 워크숍에 참여한 시민들의 푸른색 그림들이 눈에 띈다. 파란 하늘, 내가 좋아하는 푸른 것 등 다양한 주제를 표현한 참여자들의 결과물은 작가의 작품과 함께 놓여 각자의 얘기를 보여준다.
"블랙홀 사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실제 블랙홀이 너무 크니 굉장히 많은 이미지 데이터를 모은 뒤 그것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구성하더라고요. 그것처럼 화분과 사진, 나의 그림과 사람들의 그림 속 푸른색들이 모이면 도시 풍경의 중간값을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단순한 푸른색의 재현이 아닌 도시인들의 삶이자 시공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나중에는 화분을 옆에 두지 않고도 푸른색으로만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전하고 싶다"며 "마치 트로트 가락처럼 우리의 정서 속에 자연스럽게 그 푸른색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중구 봉산문화회관 2층 아트스페이스에서 9월 22일까지 감상할 수 있다. 월요일과 추석 연휴는 쉬어간다.
한편 8월 13일부터 23일까지는 전시와 연계한 예술교육 워크숍이 펼쳐진다. 허태원 작가가 직접 강사로 참여해 전시를 소개하고, 공동정원 조성 등 체험 워크숍을 진행한다. 참여 희망자는 전화 예약 후 신청서를 제출하면 된다. 053-422-6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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