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읽기를 마쳤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완독에 성공한 남자의 이야기라니. 백과사전을 완독하겠다는 생각부터가 범상치 않다. 저자 제이콥스의 백과사전 탐독기를 쫓다보면 놀라운 일의 연속인데, 특히 그의 기억력과 몰입도 앞에선 절로 무릎을 꿇게 된다. 나름의 방법과 규칙을 세워 외우며 암기하기를 반복한 결과라고는 해도 3만 3천 여 쪽의 백과사전을 완독도 모자라 외워버리다시피 했다니. 물론 가족과 친구들은 쉼 없이 쏟아지는 지식의 보고에 질려버린 지 오래지만.
저자가 브리태니커를 외운 방법은 모듈화와 대칭구조의 활용이다. 특히 모듈화 방식은 하나의 단일 지식으로 저장하므로 기억이 일정한 형태를 갖는다. 흩어진 물은 전달할 수 없듯이 기억도 덩어리 지워 보존해야 한다.
나 역시 외우는 일에 천착해온 사람이다. 초등학교 시절이었나, 일본 후지TV에 출연으로 유명해진 암기왕 손주남 박사가 텔레비전에 나와 엄청난 암기력과 기억력을 선보였다. 어린 마음에 나도 저 아저씨처럼 기억력이 출중한 사람이 되리라, 다짐한 게 시발점이 된 듯하다. 그래봐야 마음일 뿐, 기억력 증강을 위해 특별히 훈련을 받거나 학원에 다닌 것은 아니었다.
흥미롭게도 나의 기억력은 꽤나 쓸 만한 지경으로 발전되었다. 흘깃 본 영화포스터의 내용을 거의 빠짐없이 기억했고, 사물과 인물의 특징을 찾아내 사진 찍듯이 포착하는 일종의 모듈화 방식으로 기억을 저장해왔다. 히말라야 8천m급 14좌의 이름과 높이 정도는 당연히 술술 나와야 하고, 1㎏은 1,000㎥ 물의 무게로 정의되는데, 1㎏이 파리 근교의 세브르라는 마을에 백금-이리듐 원통으로 만들어져 실존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도 기억하게 되었다.
친구들은 쓸데없는 거 외우는데 선수라며 놀렸지만 가끔은 쓸데없다고 여긴 기억들이 화려하게 등장해 빛을 발하기도 하였다. 언젠가 우연히 식사자리에 동석하게 된 배우 최덕문은 자신이 '박하사탕'에 단 2초 나온 장면(그것도 고개를 쳐 박은)을 내가 기억하는 것에 혀를 내둘렀다. 이처럼 나의 기억력은 영화평론가라는 직업을 지키는데 1등 공신이 돼주었다. 영화는 종합예술이라서 감독과 배우와 배역과 스태프 말고도 온통 외워야 할 이름과 장소와 물건들로 가득하니 말이다.
한편 전혀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낭패인 적도 있었다. 명함까지 주고받았고 얼굴은 낯이 익지만 이름을 기억 못한 일, 예컨대 영화제 라운지에서 만난 어느 필리핀 감독은 내게 먼저 악수를 청하며 친근하게 다가온 반면 나는 당황스런 표정으로 그가 누군지 기억해내지 못했다(그가 작년과 달리 수염을 길렀고 머리가 반삭이었다는 게 변명거리가 될까). 이렇게 전후가 안 맞고 기억력이 들쭉날쭉해서야. 만약 올바르게 기억력을 신장시켜왔다면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의 저자까진 아니더라도 새뮤얼슨의 '경제학' 정도는 달달 외웠을 텐데.
따지고 보면 세상의 거의 모든 불행은 나쁜 일들을 잊지 못한 채 기억을 고집하는 데서 벌어졌는지도 모른다. 하수상한 시절, 지워버릴 것과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을 잘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기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의미 있는 것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 개인사라고해서 다를 게 없을 것인즉 기억을 역사로 만드는 동력은 기록이다.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그러니, 반드시 기억하고 기록하자. 무엇을? 무엇이든!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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