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함재봉 칼럼] 미국 정치의 감동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장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장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장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인 동물'이라고 했다. 권모술수에 능하고 권력투쟁을 즐겨서가 아니다. 반목하고 갈등하고 복수하면서도 가끔은 서로에게 감동을 주고 화합하고 하나가 되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기적이고 편파적이고 생존경쟁에 익숙한 인간들을 하나로 아울러서 선한 것을 추구하는 공동체로 승화시키는 능력을 정치라고 하였다.

지난 2주 동안 미국은 정치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고령 문제로 자신의 당인 민주당 내에서도 사퇴를 종용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7월 21일 재선을 포기하고 부통령 카멀라 해리스에게 민주당 대선 후보직을 양보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놀라운 결단이었다. 그가 얼마나 권력욕이 강한 사람인지, 대통령이 되기 위해 평생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리고 재선을 얼마나 원했는지 아는 사람들은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를 위해서, 당을 위해서 자신의 야심을 내려놓겠다는 그의 후보 포기 연설은 감동 그 자체였다.

바이든은 31세에 델라웨어주 상원의원에 처음 당선되어 6선을 거듭하면서도 대선은 2번 출마하였으나 낙마하고 2008년 부통령에 당선된다. 19세나 연하인 오바마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직을 8년간 수행하지만 임기를 마친 오바마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직을 바이든 대신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게 넘겨준다.

클린턴이 트럼프 후보에게 패하여 정권을 공화당에 넘겨주자 바이든은 4년간 절치부심 끝에 트럼프의 재선을 막고 2018년 대선에서 78세의 고령에 대통령에 당선된다. 당시에도 바이든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을 점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백악관에 입성하지만 이미 대통령 취임 당시 미국 역사상 가장 고령의 대통령이었던 바이든은 특히 지난 6월 27일 트럼프와의 토론회에서 중언부언하면서 전혀 상대방의 공격에 반격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이후로 민주당 내에서 그의 사퇴를 종용하는 목소리는 급속히 커진다.

그러나 바이든이 실제로 후보직을 스스로 내놓을 것이라고 자신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바이든의 좌우명은 '한 대 맞고 쓰러지면 다신 일어난다'였다. 그가 얼마나 강한 의지의 소유자인지, 고집이 얼마나 센지, 권력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가 후보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했을 때 놀라움과 감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한다.

"저는 대통령으로서의 저의 업적이나, 제가 세계를 이끌어 온 지도력, 미국의 미래에 대한 저의 비전을 볼 때 대통령직을 연임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민주주의를 살리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야심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저는 새 세대에 횃불을 넘기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결심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통합할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오랜 공직의 경험이 필요할 때와 장소는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새 목소리, 신선한 목소리, 젊은 목소리가 필요할 때와 장소도 있습니다. 그 시간과 장소는 바로 지금입니다."

후보직을 이어받은 카멀라 해리스는 지금 놀라운 속도로 민주당을 결집시키면서 미국 대통령 선거에 새로운 에너지와 열기를 불어넣고 있다. 무명에 가까웠던 해리스가 이처럼 놀라운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그동안 드러나지 않던 본인의 내공도 큰 몫을 하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가 바이든으로부터 바통을 넘겨받는 과정이 미국민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당선을 전후로 하여 미국 정치의 타락, 미국 민주주의의 쇠락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정책 토론보다는 인신공격, 감동적인 연설보다는 저질스러운 언사, 통합과 포용 대신 갈라치기가 횡행하면서 250년 된 미국 민주주의도 이제 하락의 길로 접어든 것이 아닌가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다시 한번 정치가 얼마나 감동적일 수 있는지, 미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강하고 멋질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어떤 후보의 정책이 미국을 위해 더 좋은지 논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정책과는 또 다른 차원이다. 아무리 좋은 정책과 이념도 정치처럼 유권자들을 열광하게 하고 국민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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