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덕일의 우리 역사 되찾기] 세종이 최윤덕·김종서를 북방으로 보낸 까닭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현재 고등학교 학생들이 배우는 『한국사교과서』는 조선의 세종이 최윤덕과 김종서를 보내 4군6진을 개척함으로써 조선의 북방강역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확장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고려 북방영토는 압록강에서 비스듬히 동남쪽 사선으로 함경남도까지였는데 세종 때 압록강~두만강까지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압록강~두만강 이북은 고려·조선 천 년 동안 우리 강역인 적이 없었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일본이 1909년 간도협약으로 두만강 이북 간도땅을 청에 팔아넘겼다고 비판한다. 천년 동안 우리 땅이 아니었던 간도를 일본이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앞뒤 논리가 맞지 않으니 할 수 없이 외워야 한다.

윤관의 입도척경비, 두만강 북쪽 700리가 고려국경이라는 조선시대 그림이다.
윤관의 입도척경비, 두만강 북쪽 700리가 고려국경이라는 조선시대 그림이다.

◆영토에 밝았던 세종

세종은 재위 15년(1433) 최윤덕과 김종서를 북방으로 파견하는데, 그해 3월 20일 신하들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고려의 윤관은 17만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소탕하여 주진(州鎭)을 개척했으니 그 공이 진실로 작지 않다. 윤관이 설치할 적에 길주(吉州)가 있었는데, 지금 길주가 예전 길주와 같은가. 고황제(高皇帝:명 태조)가 조선 지도를 보고, '공험진 이남은 조선의 경계라'고 하였으니, 경들이 참고하여 아뢰라.(『세종실록』 15년 3월 20일)"

『세종실록』은 "이때 임금이 파저강 정벌에 뜻을 기울였기 때문에 이런 전교가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파저강은 압록강 북쪽 만주에 있는 강이다. 실제로 최윤덕은 3월 27일 세종의 명을 받들어 압록강을 건너 군사를 일곱군데로 진군시켜 4월 19일 여진족을 공격해 승전을 거두었다. 세종이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공험진 이남은 조선 경계'라는 말처럼 조선 강역 내의 여진족을 공격한 것이다. 고려의 윤관이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 선춘현(先春峴)에 '고려지경(高麗之境:고려강역)'이라는 비석을 세웠는데 여기까지 고려·조선의 북방강역이었다.

◆백성들의 북방 이주

고려에 이어 조선의 태종은 명의 영락제와 다시 국경 협정을 맺었는데, 압록강 북쪽 600여리의 요녕성 심양(瀋陽) 남쪽 철령부터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까지는 조선 강역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대주의에 찌든 조선의 사대부들은 압록강~두만강 북쪽 강역을 실질적으로 유지하는데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자 여진족들이 가끔 준동했고 세종은 최윤덕과 김종서를 보내 압록강~두만강 북쪽 강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려 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 지역에 여진족뿐만 아니라 조선 백성들도 거주해야 했다.

조선 백성들이 북방 이주를 꺼리자 김종서는 세종 16년(1434) 1월 토관직(土官職)을 대거 신설해 백성들의 이주를 촉진시키자고 건의했다. 동반(東班:문신) 5품부터 9품까지, 서반(西班:무신) 5품부터 9품까지 모두 90개의 관직을 신설해 사대부와 백성들의 이주를 촉진시키자는 건의였다. 조정 대신들은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수의 토관을 신설할 수 없다며 반대했으나 세종은 달랐다.

"새로 창설하는 초기인지라, 토관을 설치하여 사기를 돋구는 것이 급선무이니, 관직의 액수를 줄이지 말고 이조(吏曹)로 하여금 김종서가 계달한 그대로 시행하게 하라."

벼슬이나 신분 상승만큼 다른 지역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데 효과가 있는 보상은 없었으므로 토관직을 신설해서 경상·전라·충청·강원도 등 남쪽 지방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또한 양민들에게는 재능에 따라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특혜도 주었다.

또한 압록강~두만강 북쪽에 사는 여진족들에게도 이 땅이 조선 땅임을 명확하게 알게 했다. 세종은 재위 19년(1437) 5월 김종서에게 전지를 보내 "회령(會寧)은 바로 공험진 안에 매인 본국의 땅이다. 전에 비어 있던 곳이기 때문에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여진족 추장)가 거주를 청하기에 허락하여 너희들(여진족)이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이다"라고 알려주라고 명했다. 두만강 북쪽 강역에 여진족들을 살게 허락하면서도 공험진까지는 조선 강역임을 분명하게 알게 했다.

세종
세종

◆윤관의 비석을 찾게 한 세종

최윤덕, 김종서가 압록강~두만강 북방이 조선 강역임을 확실하게 하자 세종은 재위 21년(1439) 3월 6일 공조 참판 최치운(崔致雲)을 북경에 보내 이 일대는 조선 영토라고 다시 알렸다. 세종은 그해 8월 6일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전지를 내려 이렇게 명령했다.

"동북 강역은 공험진이 경계라는 말이 전해진 지는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인지는 알지 못한다. 본국(本國)의 땅을 상고해 보면 본진(本鎭:공험진)이 장백산(長白山:백두산) 북록(北麓)에 있다 하나 역시 허실(虛實)을 알지 못한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윤관이 공험진에 비(碑)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고 하였다. 지금 들으니 선춘점(先春岾)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본진(本鎭)이 선춘점의 어느 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가? 만일 길이 막혀서 사람을 시키기가 용이하지 않다면, 폐단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생각하여 아뢰라. 또 듣건대 강 밖(江外:두만강 북쪽)에 옛 성(城)이 많이 있다는데, 그 고성(古城)에 비갈(碑碣:윤관이 세운 비)이 있지 않을까 한다. 만일 비문이 있다면 또한 사람을 시켜 등서(謄書)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울러 아뢰라. 또 윤관이 여진(女眞)을 쫓고 구성(九城)을 설치하였는데, 그 성(城)이 지금 어느 성이며, 공험진의 어느 쪽에 있는가. 상거(相距)는 얼마나 되는가. 듣고 본 것을 아울러 써서 아뢰라.(『세종실록』 21년 8월 6일)"

세종의 이 전지는 중요한 내용을 적고 있다. 조선 북방강역이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이라는 것은 세종의 확실한 강역의식이었다. 세종의 이런 국경 인식은 『세종실록』 「지리지」에 그대로 담겨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가 말하는 조선 북방 강역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조는 "함길도는 본래 고구려의 고지(故地)이다"라고 시작한다. 고려 예종 때 윤관이 "군사 17만을 거느리고 동여진을 쳐서 몰아내고, 함주(咸州)에서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9성을 쌓아서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공험진의 선춘령에 세웠다(『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라고 말하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함길도의 남북 강역에 대해서 "남쪽 철령부터, 북쪽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1,700여리이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철령은 심양 남쪽의 만주 철령이 아니라 함경도 철령을 뜻하는 것인데, 이곳부터 공험진까지 1,700리가 함길도의 남북강역이란 뜻이다. 이것이 조선의 공식기록인 『세종실록』 「지리지」의 북방강역 인식이었다.

◆조선의 지도들

일본에서 발견된 조선 초기의 「동국지도(東國地圖)」는 세조 9년(1463) 정척(鄭陟)·양성지(梁誠之) 등이 제작했는데, 그 모사본이 세종대왕 기념관에 있다. 이 지도는 세종 18년(1436) 정척 등을 보내 두만강 일대를 실측하게 한 것과 김종서의 조사 및 강역 확장 결과 등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문종 1년(1451) 6월에 완성된 양계(兩界)지도도 마찬가지인데 「동국지도」는 이런 실측 보고서와 양계지도 등을 토대로 작성한 것인다. 「동국지도」는 공험진 선춘령을 두만강 북쪽에 있는 속평강(速平江: 모사본에는 정평강〔定平江〕) 유역으로 그리고 있다. 속평강은 현재의 수분하(綏芬下) 및 목란강(牧丹江) 상류이다.

조선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도 마찬가지로 기술하고 있으며 『북로기략(北路紀略)』, 『북여요선(北輿要選)』, 『북새기략(北塞記略)』,『북관기사(北關記事)』, 『관북읍지(關北邑誌)』 등의 조선 후기 기록들도 마찬가지로 공험진을 국경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일부 학자들과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윤관 9성의 위치를 길주(吉州) 이남에서 함흥(咸興) 평야까지로 축소해 인식하면서 조선의 강역은 두만강 이남이라는 현재의 잘못된 지리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 유학자들과 일제 식민사학

국가 공식기록인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분명히 나와 있는 북방강역에 대한 인식은 두 단계에 걸쳐 크게 왜곡 축소된다. 먼저 조선 중·후기 인물인 한백겸(韓百謙:1552∼1615)은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서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 700리가 아니라 길주 남쪽에 있었다고 축소 왜곡했다. 세종이 "윤관이 설치할 적에 길주가 있었는데, 지금 길주가 예전 길주와 같은가"라고 물은 것은 후대 한백겸처럼 불학무식한 학자들이 조선의 북방강역을 축소할 것을 미리 꾸짖은 예언처럼 여겨진다. 한백겸은 공험진이 함경도 남쪽에 있다고 우기면서 그 근거로 윤관이 세운 국경비가 함경도 마운령에 있는 석추구기(石樞舊基)라고 주장했다. 마운령 석추구기는 윤관비가 아니라 신라 진흥왕 순수비였는데, 제대로 공부해보지도 않고 선조들의 강역을 무조건 축소시킨 한백겸의 지리 인식이 조선 후기의 사대주의 유학자들에 이어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현재까지도 한국 강단사학에 의해 추앙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재 중국의 국가박물관을 비롯해 성급 박물관과 시골박물관들도 고려강역을 한반도의 2/3로 축소시켜 전시하고 있다. 현재 우리 학생들이 배우는 한국사교과서도 그렇게 그려놓고 있으니 항의하면 오히려 "너희 교과서에 그렇게 그려져 있지 않느냐?"고 망신 당할 형편이다.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 서서/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세종의 길주에 대한 질문과 김종서의 장검이 아직도 식민사학에 시든 후손들을 꾸짖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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