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학 속 호모에스테티쿠스] <41> 구약의 ‘호세아’: 도시적 욕망에서 목가적 서정으로

이경규 계명대 교수

호세아에 담긴
호세아에 담긴 '전원 유토피아' 관련 이미지. 클립아트 코리아.
이경규 교수
이경규 교수

교회 안에서 '호세아'를 거론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여호와가 선지자 호세아에게 아주 난감한 지시를 하나 하는데, 이해할 논리도 마땅찮고 모델로 따를 수만도 없는 내용이다. 때는 북이스라엘 말기, 정치 경제적으로는 번창했으나 영적으로는 매우 타락한 시대다. 어느 날 여호와는 호세아를 불러 뜬금없이 "음란한 여자"와 결혼을 하라고 지시한다. 여기서 음란한 여자란 거의 창녀를 뜻한다. 만인의 모범이 되어야 할 신의 대리인이 어찌 창녀와 결혼을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신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다. 명령이야 형식적으로라도 따를 수 있지만 심각한 의문은, 선하고 공의로운 하나님이 왜 저런 비도덕적인 일을 지시하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유를 말하기는 한다.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1:2)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나 이방 신(바알)을 섬기는 것은 아내가 남편을 배신하고 간음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바, 그런 고통과 수치를 너도 한번 당해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여호와가 그렇게 단순하고 속 좁은 신일까? 그보다는 자신들의 극심한 타락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치기 위한 반면교사의 의미가 큰 것 같다. 그러나 이것도 사안의 핵심은 아니다. 사안의 핵심은 역설적이게도 사랑이다. 여호와는 호세아에게 창녀와의 결혼을 명한 뒤 또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3:1)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배신과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분노와 벌도 내리지만 사랑은 멈추지 않겠다고 한다. 신이야 그렇다고 해도 인간도 그래야 한다는 데 딜레마가 있다. 다르게 생각하면 신의 인간 사랑과 남자의 여자 사랑이 아주 다른 차원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후자는 비유에 불과하다고 하겠지만 문학적으로 보면 후자가 더 흥미롭다. 많은 경우 비유에 비밀이 들어 있다.

잘 알듯이 구약 시대는 여자의 음행이나 불륜은 가혹하게 처벌했다. 거기에 대해 모세가 상세히 규정해 놓았고 유대인들은 그것을 준엄한 율법으로 엄수했다. 그런데 그보다 상위 심급인 여호와가 음녀와 결혼을 주선하는 것도 모자라 결혼하고도 바람피우는 아내를 계속 사랑하라고 한다. 사랑 없이 결혼하여 사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예전에는 흔한 일이었다. 사랑만으로 결혼하는 것이야말로 희귀한 일이었다. 호세아에게 문제는 결혼이 아니라 사랑이다. 아무리 신의 명령이라고 해도 사랑이 명령으로 될 일인가? 이쯤에서 문제를 문학적으로 한번 생각해 볼까 한다.

음녀(창녀)를 사랑하는 일이 신의 명령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불가항력의 운명적인 사랑을 뜻한다. 그 누구도 어쩔 수 없을 만큼 사랑에 깊이 빠졌다면 하늘을 운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도덕이나 이성 같은 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 호세아는 고멜이 음란한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결혼했고 결혼한 뒤에는 그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 그의 고통과 수치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순전히 신의 명령 때문이라면 한탄이나 원망의 마음도 클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호세아의 입에서는 원망이나 한탄의 말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선지자라 어쩔 수 없지 않냐고 할 수 있지만 요나나 욥 같은 믿음의 위인들은 여호와에게 대들기까지 했다. 호세아에겐 배신당하는 고통보다 사랑하는 기쁨이 훨씬 더 크지 않았을까? 사랑의 힘이고 미스터리다.

사랑이 신의 명령이라는 것은 불가해하고 신비한 마음을 이해하는 가장 편리한 방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문학이나 영화는 그런 경우를 많이 상상해 놓았다. 이때 남자의 순정과 고결함이 강조되기도 하고 여성의 신비한 매력이 부각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심지어 '성스러운 창녀'(Die heilige Hure)라는 개념도 마련되어 있다. 신이 호세아에게 이해 불가의 사랑을 요구한 것과 사랑 자체가 불가해하다는 사실은 같은 차원이다.

사실 '호세아'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이스라엘 사랑이나 훗날 예수의 인간 사랑도 논리·객관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뭐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타락하고 밥 먹듯 배신하는 유대 민족을 사랑하는지? 예수는 또 왜 죄 많은 인간을 죽기까지 사랑하는지? 이 불가해한 신의 속성은 사랑 자체의 불가해함과 일치한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라"(요일 4:16)는 놀라운 공식을 선언한다.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둘 다 이해 불가의 차원이다. 다만 이해 불가의 이해라는 새로운 차원이 있는 것 같다.

여호와가 그러하듯이 호세아도 간음하는 아내를 달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함엔 변함이 없다. 그런 호세아의 사랑이 고멜에게 어떤 변화를 불러왔을까? 아쉽게도 이것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비유의 논리에 따라 여호와의 사랑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보면 유추할 수 있다. 그 변화는 육욕이 불꽃 튀는 도시적 관능이 꽃향기 만발하는 목가적 아름다움으로의 변화다.

내가 이스라엘 위에 이슬처럼 내리면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버드나무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햇순이 새록새록 돋아 감람나무처럼 멋지고 레바논 숲처럼 향기로우리라. 이스라엘은 다시 내 그늘에 와 살며 농사지어 곡식을 거두리라.(14: 5-6)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미래 축복이지만 비유의 논리상 고멜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즉, 음란과 간음의 욕계에 사로잡혀 있던 여자기 꽃향기 만발하는 동산으로 돌아온다. 이슬 내리는 정원에는 나리, 버드나무, 감람나무가 목가적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이런 의미에서 '호세아'를 모티브로 영화(2022) '리디밍 러브(Redeeming Love)'는 주인공(마이클)을 멋진 농장의 농부로 설정한다. 어느 날 마이클은 도시에 갔다가 에인절이라는 창녀에게 불가항력으로 빠지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한다. 그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힘입어 도시의 유명한 창녀가 시골 강가에서 가족들과 낚시를 즐기는 농부의 아내로 변신한다. 이것은 구원받은(redeemed) 고멜의 현대적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호세아를 모티프로 한 영화
호세아를 모티프로 한 영화 '리디밍 러브'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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