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은 한반도 전역에서 조선고적조사 사업을 벌였다. 고적조사는 1909년 탁지부(현 기획재정부) 건축소 사업으로 시작됐다. 탁지부는 대한제국 산하 기관이었지만 일제의 조선총독부 지휘를 받았다. 사업명은 조선고적조사였지만 실은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일본 지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숨은 목적이 있었다. 조사는 주로 고건축과 고고학 분야 기록, 조사, 발굴사업으로 해방 전까지 계속됐다.
조사 책임자는 도쿄제국대학 세키노 다다시 건축학 교수. 동 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한 야쓰이 세이이쓰는 그의 조사단원이었다. 야쓰이는 사진촬영을 전담했다.1911년 무렵부터는 유적을 단독으로 조사 및 발굴도 했다. 주요 지역은 경주, 평양, 부여 등 고도(古都). 야쓰이는 1909년부터 1920년까지 경주를 수시로 찾아 발굴사업에 참여했다. 고적 촬영에는 유리건판을 필름처럼 사용하는 카메라 옵스큐라가 사용됐다.
이 무렵 경주에는 '동양헌' 이란 사진관이 있었다. 주인은 일본 사진작가 다나카 가메쿠마가. 경주에서 제일가는 고적 전문 사진작가였다. 그는 1907년 토함산 중턱에 석굴암 존재가 알려진 뒤 1913년부터 1920년까지 3차례 이뤄진 해체 보수공사 과정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다. 야쓰이는 경주에서 동양헌의 다나카와 깊이 교류하기도 했다.
야쓰이는 4~6세기에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신봉하던 인물. 그는 1909년 조선고적사업 중간 보고서 격인 '한홍엽(韓紅葉)'에서 "한반도는 고대부터 일본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당대에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썼다. 고적조사는 그 역사적 증거를 찾으려는 과정이기도 했다.
당시 야쓰이가 촬영한 100년 전 경주 고적 사진 원본이 일본에서 어렵게 발굴, 수집돼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진은 영남대 정인성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야쓰이의 외동딸이 보관해 오던 것을 2014년 사비를 들여 구입한 것. 모두 100여 점으로 대부분 소형(15.6×11.3cm) 유리건판으로 촬영된 것이다. 사진은 촬영본이 트리밍 없이 인화된 원본으로 학술적 사료 가치가 높다.
정 교수는 "일본에서 환수한 기록 유산을 (사)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의 도움으로 '한국고고학자가 새로 쓰는 조선고적조사보고' 발간과 함께 이제야 일반에 공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 교수가 지난 20여 년 동안 일본 등지에서 수집한 고문서, 사진 등 기록 유산은 모두 1만여 점. 최근에도 경주 유적과 불법 도굴로 수집된 유물을 기록한 사진 등 140여 점을 수집했다. 이 기록물도 정리해 조만간 공개할 예정이다.
100년 전 경주 고적 사진 원본은 (사)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과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BK사업 팀 공동주최로 경주엑스포대공원 문화센터 전시실에서 24일까지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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