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진으로 기록한 100년 전 경주 고적] 일제의 눈으로 본 조선

일제 강점기 촬영한 원본 영남대 정인성 교수 공개

1920년에 촬영된 신라 제38대 원성왕릉 오른쪽 입구에 사자상을 비롯해 문인석과 무인석이 현재와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왕릉을 둘러싼 솔숲 등 주변 풍경도 100년이 흐른 지금과 매우 흡사하다. 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1920년에 촬영된 신라 제38대 원성왕릉 오른쪽 입구에 사자상을 비롯해 문인석과 무인석이 현재와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왕릉을 둘러싼 솔숲 등 주변 풍경도 100년이 흐른 지금과 매우 흡사하다. 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1920년 원성왕릉 오른쪽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무인석과 조선인. 100년 전 무인석도 지금처럼 하반신 조각이 훼손된 모습이다. 석상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 사람을 옆에 세워 촬영했다. 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1920년 원성왕릉 오른쪽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무인석과 조선인. 100년 전 무인석도 지금처럼 하반신 조각이 훼손된 모습이다. 석상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 사람을 옆에 세워 촬영했다. 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일제가 처음으로 해체, 복원하기 전인 1912년과 1913년 사이 눈 내린 겨울에 촬영한 석굴암 본존불. 당시 경주에서 동양헌이란 사진관을 운영한 일본 사진작가 다나카가 촬영했다. 촬영-다나카, 소장-정인성
일제가 처음으로 해체, 복원하기 전인 1912년과 1913년 사이 눈 내린 겨울에 촬영한 석굴암 본존불. 당시 경주에서 동양헌이란 사진관을 운영한 일본 사진작가 다나카가 촬영했다. 촬영-다나카, 소장-정인성
석굴암 입구 사천왕상 가운데 하나인 광목천 오른쪽에
석굴암 입구 사천왕상 가운데 하나인 광목천 오른쪽에 '사립 보성학교 수학여행단', '공립 경주보통학교 수학여행단-신해(1912년) 4월 30일', 메이지 45년(1912년) 4월 28일 가가와 현인 마야케 호타로' 라고 쓴 낙서가 보인다. 촬영-다나카, 소장-정인성
1913년 10월 석굴암 해체를 위한 가설 비계공사를 시작했으나 추위로 공사가 중단돼 이듬해인 1914년 5월부터 석재 채취, 석굴 해체에 착수해 같은해 9월에 해체를 마무리했다. 이후 1915년 5월부터 석굴 조립을 시작해 9월 13일 1차 복원공사를 준공했다. 촬영-다나카, 소장-정인성
1913년 10월 석굴암 해체를 위한 가설 비계공사를 시작했으나 추위로 공사가 중단돼 이듬해인 1914년 5월부터 석재 채취, 석굴 해체에 착수해 같은해 9월에 해체를 마무리했다. 이후 1915년 5월부터 석굴 조립을 시작해 9월 13일 1차 복원공사를 준공했다. 촬영-다나카, 소장-정인성
1915년 석굴암 1차 복원 공사 당시 시멘트 보강 공사로 누수와 습기가 발생하자 1917년에 2차 공사를 실시했다. 2차 공사는 부분적으로 실시돼 3년 만인 1920년에 3차 방수 공사를 했다. 사진은 석굴암 3차 방수 공사 장면이다. 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1915년 석굴암 1차 복원 공사 당시 시멘트 보강 공사로 누수와 습기가 발생하자 1917년에 2차 공사를 실시했다. 2차 공사는 부분적으로 실시돼 3년 만인 1920년에 3차 방수 공사를 했다. 사진은 석굴암 3차 방수 공사 장면이다. 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은 한반도 전역에서 조선고적조사 사업을 벌였다. 고적조사는 1909년 탁지부(현 기획재정부) 건축소 사업으로 시작됐다. 탁지부는 대한제국 산하 기관이었지만 일제의 조선총독부 지휘를 받았다. 사업명은 조선고적조사였지만 실은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일본 지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숨은 목적이 있었다. 조사는 주로 고건축과 고고학 분야 기록, 조사, 발굴사업으로 해방 전까지 계속됐다.

조사 책임자는 도쿄제국대학 세키노 다다시 건축학 교수. 동 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한 야쓰이 세이이쓰는 그의 조사단원이었다. 야쓰이는 사진촬영을 전담했다.1911년 무렵부터는 유적을 단독으로 조사 및 발굴도 했다. 주요 지역은 경주, 평양, 부여 등 고도(古都). 야쓰이는 1909년부터 1920년까지 경주를 수시로 찾아 발굴사업에 참여했다. 고적 촬영에는 유리건판을 필름처럼 사용하는 카메라 옵스큐라가 사용됐다.

이 무렵 경주에는 '동양헌' 이란 사진관이 있었다. 주인은 일본 사진작가 다나카 가메쿠마가. 경주에서 제일가는 고적 전문 사진작가였다. 그는 1907년 토함산 중턱에 석굴암 존재가 알려진 뒤 1913년부터 1920년까지 3차례 이뤄진 해체 보수공사 과정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다. 야쓰이는 경주에서 동양헌의 다나카와 깊이 교류하기도 했다.

야쓰이는 4~6세기에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신봉하던 인물. 그는 1909년 조선고적사업 중간 보고서 격인 '한홍엽(韓紅葉)'에서 "한반도는 고대부터 일본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당대에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썼다. 고적조사는 그 역사적 증거를 찾으려는 과정이기도 했다.

당시 야쓰이가 촬영한 100년 전 경주 고적 사진 원본이 일본에서 어렵게 발굴, 수집돼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진은 영남대 정인성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야쓰이의 외동딸이 보관해 오던 것을 2014년 사비를 들여 구입한 것. 모두 100여 점으로 대부분 소형(15.6×11.3cm) 유리건판으로 촬영된 것이다. 사진은 촬영본이 트리밍 없이 인화된 원본으로 학술적 사료 가치가 높다.

정 교수는 "일본에서 환수한 기록 유산을 (사)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의 도움으로 '한국고고학자가 새로 쓰는 조선고적조사보고' 발간과 함께 이제야 일반에 공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 교수가 지난 20여 년 동안 일본 등지에서 수집한 고문서, 사진 등 기록 유산은 모두 1만여 점. 최근에도 경주 유적과 불법 도굴로 수집된 유물을 기록한 사진 등 140여 점을 수집했다. 이 기록물도 정리해 조만간 공개할 예정이다.

100년 전 경주 고적 사진 원본은 (사)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과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BK사업 팀 공동주최로 경주엑스포대공원 문화센터 전시실에서 24일까지 전시 중이다.

1919년 촬영된 태종무열왕릉비. 거북모양의 귀부 위에 비석은 없고 이수가 얹혀 현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귀부 사방에는 비각을 세웠던 주춧돌이 놓여있다. 뒤로 선도산이 보인다. 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1919년 촬영된 태종무열왕릉비. 거북모양의 귀부 위에 비석은 없고 이수가 얹혀 현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귀부 사방에는 비각을 세웠던 주춧돌이 놓여있다. 뒤로 선도산이 보인다. 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1909년 촬영된 경주 서악리 선도산 자락에 자리한 고분군 전경. 4기의 큰 능 주변으로 작은 무덤이 여러기 들어서 있고 일부 봉분에는 도굴 흔적도 보인다. 태종무열왕릉은 왼쪽에 자리하고 있으나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 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1909년 촬영된 경주 서악리 선도산 자락에 자리한 고분군 전경. 4기의 큰 능 주변으로 작은 무덤이 여러기 들어서 있고 일부 봉분에는 도굴 흔적도 보인다. 태종무열왕릉은 왼쪽에 자리하고 있으나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 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1909년 황남리 고분(현 143호분) 앞 당나귀와 조선인. 당시 당나귀는 체구가 작은 조선말과 함께 짐을 싣거나 사람이 타고 다니던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1909년 황남리 고분(현 143호분) 앞 당나귀와 조선인. 당시 당나귀는 체구가 작은 조선말과 함께 짐을 싣거나 사람이 타고 다니던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1909년 황남리 남총(현 144호분) 발굴 당시 모습. 1906년 발굴을 시도하다 실패해 다시 봉분에 좁고 깊은 구덩이를 파던 도중 붕괴사고가 발생해 발굴이 중단됐다. 이후 서악리 무덤에서 최초 발굴작업이 이뤄져 이때 출토된 유물은 모두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됐다.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1909년 황남리 남총(현 144호분) 발굴 당시 모습. 1906년 발굴을 시도하다 실패해 다시 봉분에 좁고 깊은 구덩이를 파던 도중 붕괴사고가 발생해 발굴이 중단됐다. 이후 서악리 무덤에서 최초 발굴작업이 이뤄져 이때 출토된 유물은 모두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됐다.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1915년 경주 보문리 부부총 발굴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고분 앞 다랑논에서 농부가 모내기를 위해 써레질을 하고 있다. 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1915년 경주 보문리 부부총 발굴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고분 앞 다랑논에서 농부가 모내기를 위해 써레질을 하고 있다. 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1920년 대나무로 만든 갈쿠리를 들고 카메라 앞에 선 경주 어린이들. 하나같이 광목 천으로 만든 하얀옷을 입고 있다. 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1920년 대나무로 만든 갈쿠리를 들고 카메라 앞에 선 경주 어린이들. 하나같이 광목 천으로 만든 하얀옷을 입고 있다. 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1919년 신라 제33대 성덕왕릉 십이지상 중 원숭이상 옆에 선 야쓰이. 유적지 답사에 조선말을 타고 다닌듯 승마복 차림을 하고 있다. 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1919년 신라 제33대 성덕왕릉 십이지상 중 원숭이상 옆에 선 야쓰이. 유적지 답사에 조선말을 타고 다닌듯 승마복 차림을 하고 있다. 촬영-야쓰이, 소장-정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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