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용삼의 근대사] 일본 항복, 조선 해방의 순간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옥음방송으로 알려진
옥음방송으로 알려진 '종전에 관한 조서'를 발표하는 히로히토 천황.

1945년 8월 15일 정오.

NHK(일본방송협회) 아나운서 와다 노부카타(和田信賢)가 "지금부터 중대 방송이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은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일본 국가 기미가요에 이어 히로히토 천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4분 37초간 '종전에 관한 조서'를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일본에서는 이를 '옥음(玉音)방송'이라 명명했다.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나의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토록 했다.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고통은 심상치 않고, 너희 신민들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 시운이 흘러가는바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뎌, 이로써 만세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천황의 '종전에 관한 조서' 방송이 끝나자 조선인들의 만세 소리가 폭발하여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천황의 항복 방송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도쿄에서 직접 송출된 방송이어서 잡음이 심한데다 황실 고유의 고어(古語)투 문장, 그리고 '공동선언 수락'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뜻한다는 내용임을 이해한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시인 박두진은 천황의 항복 방송을 서울 근교 안양에서 들었다. 뛰는 가슴을 진정하고 박두진은 경성행 기차에 올랐다. 하지만 감격에 들떠 도착한 그날 오후 서울 시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고 한다. 그는 8월 15일 당일 서울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경성 역에서 내리니 거리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경성 역을 나와 남대문 역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사람들 무리 속에 섞였다."

조선인들이 해방의 기쁨 만끽한 것은 하루 지난 8월 16일부터였다. 하지만 총독부 청사 제1회의실에서 전원이 기립한 가운데 방송을 청취한 조선총독부 직원들은 사정이 달랐다. 방송이 끝나자 총독부 제1회의실은 무거운 침묵이 한 동안 이어지다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총독의 대성통곡이 터져 나왔다. 다른 일본 관리들은 기진맥진한 표정이었다.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천황의 항복방송을 듣고 대성통곡했다.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천황의 항복방송을 듣고 대성통곡했다.

◆비밀문서 소각으로 검게 물든 서울 하늘

천황의 '옥음방송'이 한반도에 울려 퍼지던 시각, 소련군 선발부대는 청진까지 진출해 있었다. 이제 저들이 기차를 타고 서울로 밀려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비상이 걸린 총독부 관리들은 기밀문서 소각을 지시했다. 파기해야 할 기밀문서를 창밖으로 집어던지면 아래에서 기름을 부어 소각했다. 곳곳에서 연기가 치솟아 서울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조선총독부가 일본의 패전이 임박했음을 최초로 인지한 때는 1945년 1월 14일 소집된 긴급 회의에서였다. 이날 조선 주둔 17방면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 대장은 일본의 패전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실토했다. 17방면군 참모장 이하라 준지로(井原潤次郎) 소장은 "잘 버티면 내년 3월, 빠르면 금년 10월 말"이라고 패전 시기까지 공개하여 파문이 일었다.

1945년 7월 26일 포츠담에 모인 연합국 수뇌는 일본제국에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며, 이를 거부하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을 맞게 될 것"이라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일본 군부는 "1억 총 옥쇄"를 외치며 강력 저항을 선언했다. 미국은 항복을 거부하는 일본을 압박하고, 소련이 대일전에 본격 참전하기 전에 서둘러 전쟁을 끝내기 위해 8월 6일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우라늄 원폭), 8월 9일 나가사키에 팻맨(플루토늄 원폭)을 투하했다. 상상하기 힘든 미증유의 피해를 입은 일본은 경악했다.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기 몇 시간 전, 소련은 150만 대군과 전차·자주포 5천556대, 항공기 3천721대를 동원하여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일본군을 공격했다. 8월 9일 소련군이 웅기와 나진을 공격했고, 8월 13일 청진에 상륙했다.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할 수 없다며 항복으로 유도한 스즈키 간타로 총리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할 수 없다며 항복으로 유도한 스즈키 간타로 총리

미국의 원폭 공격과 소련군의 선전포고라는 최악의 상황에 처한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 일본 총리는 8월 9일 오전 최고 전쟁지도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더 이상 전쟁 지속은 불가능하다,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전쟁을 종결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남은 문제는 어떤 조건으로 항복할 것인가의 여부였다. 이를 두고 참석자 의견이 천황제 유지(국체보지) 1개 조건론(스즈키 총리, 도고 시게모리 외상)과 일본 군부의 4개 조건론으로 양분됐다.

◆원자폭탄 얻어맞고 '무조건 항복' 선언

회의 도중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 투하 소식이 전해졌다. 이 와중에도 항복 조건에 합의하지 못한 관계자들은 히로히토 천황 앞에서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천황은 국체보지 단일 조건으로 연합군에 항복한다는 국가 방침을 정했다. 8월 10일 새벽, 일본 정부는 이 방침을 중립국인 스위스·스웨덴을 통해 연합국에 전달했다. 하지만 연합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고, 천황제 유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로 인해 8월 12일 긴급 각의에서 또 다시 논란이 벌어졌고, 천황의 결단을 얻기 위해 8월 14일 오전 2차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히로히토는 "포츠담 선언(무조건 항복) 수락"을 최종 결정했고, 이를 연합국에 전달했다. 그리고 관련 내용을 천황의 육성방송을 통해 일본제국 신민들에게 알리기로 했으며, 미리 녹음한 천황의 항복 방송은 다음날 정오 도쿄에서 직접 송출하기로 했다.

이처럼 사태가 급박하게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는 항복과 관련, 본국 정부로부터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 다만 8월 10일 청취한 단파방송을 통해 일본 정부가 천황제 유지 조건으로 연합국에 항복의사를 밝힌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8월 14일 밤 11시, 일본 국책 통신사인 도메이(同盟)통신 경성지국에 15일 정오 천황이 육성방송을 통해 전 국민에게 낭독할 조서 전문이 전달됐다. 도메이통신 경성지국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니시히로 다다오(西廣忠雄), 제17방면군 참모장 이하라 준지로 소장에게 관련 사실을 통보했다.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고 비탄에 빠진 일본인.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고 비탄에 빠진 일본인.

불길한 소식을 접한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정무총감은 일본 내무성에 조선 내의 제반 정세 처리와 난국을 헤쳐 나갈 방법에 대해 훈령을 요청했다. 일본 정부는 "상대국 관헌과 협력해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만전을 기하되 가급적 현지에 잔류하거나 정착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한반도·대만·만주에 거주하는 일본군과 일본인은 각자 알아서 요령껏 살아남으라는 뜻이었다. 일본 정부는 해외 파견 일본군과 일본 민간인 660만 명의 생명과 재산을 대책 없이 내팽개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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