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새론새평] 삼권분립의 퇴행

장우영 대구가톨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장우영 대구가톨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장우영 대구가톨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유럽의 시민혁명이 정점을 향해 내달리던 1748년 권력론의 정수로 꼽히는 '법의 정신'이 출간되었다. 20년 넘는 고뇌의 시간을 바친 이 역작에서 몽테스키외(Montesquieu)는 공공 영역의 권력을 세 개로 나누는 기발한 발상을 제시했다. 오늘날 초등학생들도 줄줄 읊고 다니는 삼권분립과 견제와 균형 레퍼토리가 그의 아이디어다.

그 이념은 당대를 지배하던 절대왕정을 파열하고 삼권이 분립된 민주정을 태동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고 국가권력은 독점과 부패에서 벗어나 '근거(입법)와 집행(행정)과 판단(사법)'의 메커니즘으로 전환되었다.

한편 욕망이 절제되지 않는 현실에서 권력을 균등하게 분할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현대 민주주의는 입법과 행정 중 선택적으로 우위를 부여하는 권력구조를 고안했다. 내각제와 대통령제가 대표적인 유형이다. 국민이 선출한 대표가 전담하는 입법부와 행정부가 두 권력구조를 이끈다. 통상 사법부의 전문성이 더 높지만 선출된 대표의 위상을 넘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이행기에 국민 열망을 좇아 대통령제를 채택했다. 동시에 국회해산권과 비상조치권을 폐기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켰다. 또한 탄핵소추권, 국정감사권, 국정조사권을 통해 입법부의 행정부 견제 권능을 강화했다. 이러한 제도 변화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이후 두 명의 대통령이 탄핵 소추되는 불행을 자극했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은 행정부가 입법부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특히 다수파 야당이 지배하는 입법부에 맞서 소수파 정부가 국정 기조를 지킬 수 있는 최종 병기다. 실제로 민주화 이후 대통령이 거부한 법률안이 국회에서 재의결된 경우는 1건에 불과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둘러싸고 논란이 뜨겁다.

윤 대통령은 2년 남짓 동안 21번 거부권을 행사했다. 박정희에서 문재인에 이르는 60년간의 대통령 거부권 횟수와 같은 수치다. 그리고 6공화국 보수 정부의 대통령들이 각각 1건(이명박)과 2건(박근혜)의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점에서도 확연히 대조된다. 이처럼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도드라지고 그 효과 또한 강력하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법률안 거부권 행사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미국의 경우 건국 이후 연평균 11건이 넘는 2천596건의 거부권이 행사되었다. 이 중 47%(1천219건)는 루스벨트와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몫이었다. 이런 점에서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건수는 무난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수치에 가려진 본질이다.

첫째,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거부권을 제한적으로 행사하는 전통의 국가다. 이 전통은 양당의 합의와 의회주의를 존중함으로써 극단적 갈등의 완충재로 역할했다. 둘째, 무엇을 거부했느냐가 요체다. 국정 의제 외의 국민적 관심사는 거부가 아니라 소통과 규명이 필요하다. 이태원 참사, 김건희 여사 의혹, 채 상병 수사 관련 법률안은 거부권으로 마감되지 않는 이슈다. 셋째, 대통령 거부권과 야당의 탄핵 소추 남발로 국민이 분열되고 국가가 병들고 있다. 대결이 능사가 아니라 멈추고 숙고하는 덕성이 절실한 시점이다.

거부권 정치의 다른 한 축은 야당이다. 끝을 알 수 없는 '무도한 검찰 독재' 타령은 거부권을 불러내는 주술이다. 현 정부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와 돈봉투 수사 검사를 포함한 18건의 탄핵 소추안을 발의했다. 정부 수립 후 76년간 발의된 탄핵 소추 건수의 56%에 달한다. 당대표 사법 처리 위기에 입법부가 탄핵 공장으로 변질된 것이다. 나아가 "없는 죄 만들면 재판부는 국민적 저항을 받을 것"이라고 사법부를 겁박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삼권분립은 권력에 대한 불신에서 등장한 시스템이다. 그리고 그 목표는 시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이다. 투전놀이하듯 내던지는 거부권과 탄핵 소추는 견제와 균형 장치가 아닐 터이다. 그것은 저주와 파멸의 서사로 종국에는 삼권분립과 국민의 삶을 무너뜨릴 것이다. 이 찬연한 문명시대에 한국 정치는 왜 이토록 퇴행적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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