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시원한 그늘 만드는 등나무, 칡과는 갈등 일으키는 주역

대구상인초등학교의 등나무 쉼터. 운동장 스탠드의 지붕 역할을 하고 있다.
대구상인초등학교의 등나무 쉼터. 운동장 스탠드의 지붕 역할을 하고 있다.

절기로는 처서이지만 한낮의 햇살은 뜨거움을 넘어서 생살이 따끔할 정도로 강하다. 이럴 땐 등나무 그늘이 여전히 그리워진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집 주변에 등나무를 심었다. 등나무 주위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 대신에 시렁처럼 막대기로 얼기설기 걸쳐놓아 덩굴이 빼곡하게 덮게 되면 시원한 그늘이 만들어진다.

살평상 하나 있으면 땡볕을 피하기에 좋은 쉼터가 된다. 어릴 적에 동네 등나무집이나 학교에는 이런 쉼터가 흔했다. 요즘 아파트단지나 시골 마을 어귀에 정자나 퍼걸러가 있어도 성능 좋은 냉방시설에 밀려 인기가 시들하지만 예전에는 이런 쉼터가 대부분 마을 어른들의 여름 사랑방 구실을 했다.

대구 청라언덕의 등나무 쉼터에 등꽃이 활짝 피어 있다.
대구 청라언덕의 등나무 쉼터에 등꽃이 활짝 피어 있다.

◆연보랏빛 달콤한 향기의 등꽃

대구상인초등학교, 대구죽전초등학교, 대구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의 수십m씩 연결된 등나무 그늘은 지역의 명물로 자리매김했다. 4월 중순이면 연보랏빛의 아름다운 등꽃이 수없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데 옛사람들은 이를 자등화(紫藤花)라고 불렀다.

등나무 꽃은 보라색이 많지만 간혹 하얀 꽃도 눈에 띈다. 달성군 문씨 집성촌인 인흥마을의 개인 정원에는 백옥 같은 등꽃이 벌과 나비들을 부른다.

대구 달성군 인흥마을의 개인 정원에 핀 흰등꽃
대구 달성군 인흥마을의 개인 정원에 핀 흰등꽃

등꽃이 지면 잔털이 덮인 콩꼬투리 모양의 열매가 등나무 아래에로 주렁주렁 매달린다. 콩과 식물이라 거름기 없는 땅에서도 잘 자란다. 등나무는 예쁜 꽃으로 눈을 즐겁게 해주고, 달콤한 향기로 코를 편안하게 하며, 무성한 줄기와 잎은 그늘을 제공해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쉴 공간을 주는 생활과 친숙한 나무다.

등꽃은 여름을 알리는 대표적인 꽃으로 고전의 다양한 풍경 묘사에 자주 등장하며 많은 시에 인용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자줏빛 등꽃 떨어지는 모습을 조선의 선비들은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는 수사(修辭)로 동원했다.

긴 여름 산방에 손님이 드물어

長夏山房客到稀 장하산방객도희

비 온 뒤에 이끼가 사립문을 오르네

雨餘苔色上林扉 우여태색상림비

자줏빛 등꽃 떨어지니 푸른 아그배꽃 피고

紫藤花落靑棠發 자등화락청당발

꾀꼬리 우니 흰 나비 날아오른다

黃栗留啼白蝶飛 황율류제백접비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책28>

조선 후기 문인인 자하(紫霞) 신위(申緯)의 시 「긴 여름」[長夏]의 일부다. 초록의 이끼, 자줏빛 등꽃,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느껴지는 아그배나무 꽃, 흰 나비 등 여름의 다양한 색감을 동원해 시각적으로 노래했다. 본인의 서실 이름을 자등서옥(紫藤書屋)이라 부를 만큼 등나무를 사랑했던 그는 등꽃에 대한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요즘 시골 경로당 어르신들도 등나무 그림을 사시사철 감상한다. 화투의 4월을 나타내는 '흑싸리'가 실은 등나무 그림이기 때문이다. 화투를 만든 일본에선 음력 4월에 등꽃축제를 벌인다. '흑싸리' 그림을 자세 보면 등나무 잎이 아래로 매달린 모양의 그림이다. 혹자는 '흑싸리'가 따로 있다고 주장하지만 싸리나무의 한 종인 검나무싸리는 진한 적자색 꽃이 피는 우리나라 자생종으로 화투와는 무관하다.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천연기념물 등나무. 한 청년을 짝사랑한 두 자매의 비극적 전설이 깃들어 있다.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천연기념물 등나무. 한 청년을 짝사랑한 두 자매의 비극적 전설이 깃들어 있다.

◆천연기념물 경주 오류리 등나무

대구경북에는 등나무 그늘 쉼터와 자생지가 있다. 그 중에서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마을 입구에는 천연기념물 등나무 4그루의 줄기가 동서로 20m, 남북으로 50m 정도 뻗어있다. 이곳은 신라 때 왕의 사냥터인 '용림'이었고, 용림에서 자라는 등나무라고 해서 '용등'으로 불렀다. 등나무 바로 곁에는 팽나무가 자리 잡고 있는데 여기에 애처로운 전설이 있다.

신라 어느 시절 이 마을의 한 농부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다. 자매가 남몰래 짝사랑하던 옆집 청년이 전쟁에 나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를 비관해 자매는 함께 마을 앞 연못에 투신했다. 이후 연못가에는 등나무 두 그루가 자라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옆집 청년은 화랑이 돼서 마을로 돌아왔다.

자기를 연모했던 자매의 사연을 듣고 갈등하던 청년도 끝내 연못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다. 이듬해에 두 그루의 등나무 옆에 한 그루의 팽나무가 갑자기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세월 탓에 연못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굵은 팽나무 위로 등나무 덩굴이 타고 올라가 자라기 시작했다.

이승에서 미처 못 이룬 사랑의 미련이 너무 과했던 탓인지, 등나무가 너무 많이 휘감는 바람에 팽나무는 비실비실 했다. 관계기관이 나서 등나무 줄기가 타고 기댈 철제 기둥을 세워서 팽나무와 강제로 떼어 놓았다.

등나무는 감고 의지할 데가 있으면 칡처럼 줄기로 나무를 칭칭 감고 위로 올라가서 햇빛을 가린다. 그러나 평지나 감고 올라갈 처지가 안 될 때는 지면의 사방으로 길게 달리듯이 뻗어나간다. 이런 성질을 경사지의 토사 붕괴 방지와 경관용으로 활용한다. 그래서 대구~포항 고속도로 절개 부분과 경북지역 산간 도로 가장자리에서 식재된 등나무를 종종 볼 수 있다.

경주 오류리 등나무.
경주 오류리 등나무.

◆안수정등(岸樹井藤)의 비유

불교 비유경(譬喩經)에 인간 존재의 허약함을 우물 속의 등나무에 비유한 이야기가 있다.한 나그네가 광막한 들판을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사나운 불길이 일어나고 놀란 코끼리 한 마리가 나그네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공격해오고 있다. 나그네는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나다 마침 등나무 덩굴이 길게 드리워져 있는 우물을 발견했다.

코끼리를 피해 등나무 덩굴을 붙잡고 우물 속으로 피신했는데 그곳에 커다란 이무기 세 마리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게 아닌가. 기겁한 나그네가 등나무 덩굴을 붙잡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하니 위에는 독사 네 마리라가 혀를 날름거리며 그를 노리고 있다.

진퇴양난의 나그네는 팔의 힘이 점점 빠지는 상황인데 설상가상으로 흰 쥐와 검은 쥐가 덩굴을 번갈아 갉아 먹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어디선가 꿀물 한 방울이 나그네 입가에 떨어졌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벌집에서 나온 꿀이었다. 지친 나그네는 꿀의 달콤함에 취해 공포도 두려움도 자신이 위태로운 처지마저 잊어버린다.

사나운 불길,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코끼리는 삶을 옥죄는 역경과 죽음을 뜻한다. 등나무 줄기는 인간의 수명을, 두 마리의 쥐는 낮과 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가리킨다. 안수정등(岸樹井藤)은 쥐가 등나무 덩굴을 갉아먹듯 닥쳐오는 위기의 순간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순간의 쾌락에 빠져 살아가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꾸짖는 경구(警句)다.

대구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의 등나무 쉼터에서 한 시민이 책을 읽고 있다.
대구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의 등나무 쉼터에서 한 시민이 책을 읽고 있다.

◆등나무와 칡의 다툼 '갈등'

요즘 당면한 사회적 과제는 갈등의 해소다. 노사 갈등, 세대 간의 사회적 갈등, 정치적 갈등, 집단 사이의 이해충돌 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선택해야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심리적 갈등에 이르기까지 양상이 다양하고 복잡하다. 소설이나 연극의 등장인물 사이에 일어나는 대립과 충돌이나 등장인물과 환경 사이의 부조리와 대립을 이르는 문학적 수사는 익히 들어온 바이다.

갈등이라는 말은 등나무에서 비롯됐다. 갈등의 한문을 풀어보면 칡을 뜻하는 葛(갈)자와 등나무를 뜻하는 藤(등)으로 두 식물의 성장 특성에서 연유한다. 우갈좌등(右葛左藤), 즉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가는 성질의 칡과 왼쪽으로 감는 등나무가 한 곳에서 만나면 감는 방향이 서로 엇갈려 뒤엉킬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식물은 생존을 위해 햇빛을 받아서 광합성을 해야 한다. 등나무와 칡은 스스로 높이 자라지 못하기 때문에 햇빛을 가리는 나무가 있으면 그 나무의 줄기를 감고 올라간다.

그런데 야산에서 등나무가 무성한 지역에는 칡이 자라지 않고 칡이 무성한 지역엔 등나무가 없어서 뒤엉킨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대구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의 등나무 퍼걸러에는 20여 그루의 등나무를 심어놓았다.
대구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의 등나무 퍼걸러에는 20여 그루의 등나무를 심어놓았다.

◆군자는 송백, 사인(邪人)은 등라(藤蘿) 같아

선비들은 등꽃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면서 등나무가 다른 나무에 기대서 자라는 습성을 업신여겼다.

옛날에 이덕유(李德裕)가 당나라 무종에게 말하기를 "군자는 송백과 같아 홀로 우뚝 서서 기대지 않지만, 사인(邪人)은 등라와 같아 다른 사람에게 붙지 않고는 스스로 일어서지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중략)전하께서는 진실로 거울과 저울처럼 공정한 마음을 지니셨으니, 시험 삼아 이로써 신하들의 사정(邪正)을 살피시어 진퇴를 결정하신다면 반드시 잘못됨이 없을 것입니다.<회재집 7권>

경북 경주시 옥산서원에 배향된 회재 이언적이 49세이던 중종 34년(1539) 10월 전주부윤으로 있으면서 올린 응지상소인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의 일부다. 군자를 홀로 꿋꿋이 서는 소나무와 측백나무에 비유하고 간사한 사람을 남에게 기대서 사는 등나무에 비유한 중국 고사를 인용했다. 김안로 등 훈신들에게 휘둘려 정사를 그르친 중종에게 임금의 마음을 뜻하는 일강(一綱)과 마음가짐을 바로하기 위한 열 가지 덕목[十目]을 제시했다.

조선시대 재앙이 생기거나 국정에 갈등이 심해지면 임금은 현실정치에 진솔한 의견을 듣고자 구언(求言) 전지를 내린다. 벼슬아치나 지방 유림들은 의견을 담은 응지상소(應旨上疏)를 올렸다. 이런 상소는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임금에게 바로 전달됐다. 왕조시대에도 임금이 바른 마음을 갖기 위해 거리낌 없는 비판과 직언을 들었다.

민주주의 시대를 살며 SNS로 소통하는 세태지만 정치적, 사회적 갈등은 더 첨예해지고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정파적 이해에 따라 광복절 기념식을 따로 치르는 등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배타적인 불통의 정치가 갈등을 확대재생산한다. 정치인의 리더십은 자기와 친한 그룹이나 팬덤에 의지하면 국민적 공감이나 확장성은 떨어진다. 민의에 귀 기울기고 구언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언론인 chunghaman@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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