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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원의 기록여행] 쥐잡기와 여름 피서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8월 12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8월 12일 자

'중앙청 당국에서는 작년 12월 중 남조선 각 도내 전 국민학교 아동들에게 일주일간 '쥐잡기'를 장려한 결과 잡힌 총 쥐는 14만 1천 마리였다. 이 중 도내 의성 사곡국민학교가 2등의 3만 원에 남부국민학교가 3등 상으로 2만 원을 받게 되어 지난 9일 도 이 보건후생국장과 박 위생시설과장이 출장, 이 국장으로부터 각각 교장에 상금 급 표창장을 수여하였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8월 12일 자)

해방 이듬해 11월에 경북도 보건후생부가 겨울을 앞두고 약 한 달 동안 쥐 박멸 운동에 나선 적이 있었다. 쥐를 잡아 오면 특별장려금을 주겠다고 유인책을 내걸었다. 쥐 한 마리에 5원씩 현금이나 물품으로 교환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당국은 가정에서 진실하게 이 운동을 이해해 흑사병 환자를 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당부를 했다. 쥐가 페스트 같은 전염병을 옮기는 주범이므로 박멸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쥐잡기는 그 이후에도 수시로 벌어졌다. 1948년 8월 더운 여름날에 보건당국은 쥐잡기 시상을 했다. 경북 의성의 사곡국민학교와 남부국민학교가 전국 국민학교(초등학교) 쥐잡기 대회에서 나란히 2등과 3등을 차지했다. 이들 학교는 쥐를 잡은 대가로 각각 3만 원과 2만 원의 상금을 받았다. 전국적으로는 14만 마리를 잡았다. 한해 전 겨울에 있었던 쥐잡기 대회 시상을 뒤늦게 한 이유는 뭐였을까. 쥐를 일일이 세고 상금 마련에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전염병이 만연하는 여름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 시상 일정을 택했을 수 있다.

그때는 시시때때로 전염병이 돌았고 여름에는 더했다. 상수도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았고 위생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 의료 약품마저 부족했다. 천연두와 발진티푸스 등 여러 전염병이 각처에서 나돌았다. 국민학교 쥐잡기 대회 시상이 있었던 그해 여름에는 모기가 옮기는 말라리아가 유행했다. 8월 상순에만 경북도의 환자가 2만 명을 넘어섰다. 1946년에는 콜레라가 번져 경북도에서만 4천4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다 보니 부민들 사이에는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컸다. 그런 와중에도 더위를 피해 여름을 즐기려는 사람들은 있었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8월 12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8월 12일 자

'대구 여행구락부에서는 시내 일간 신문사 후원하에 제1회 행사로 오는 14일(토)을 기하여 포항에서 해수욕회를 거행케 되어 회원을 모집 중인데 참가요령은 다음과 같다. 인원: 남녀 약 50명, 회비: 1천5백 원(여행 급식비 일체), 신청 장소: 대구여행사, 출발급귀일시: 14일 오후 3시 10분 대구역 출발, 16일 오전 8시 55분 대구역 착. 그리고 당일 현지에서 각종 여흥 대회도 개최할 예정이라 한다.' (남선경제신문 1948년 8월 12일 자)

대구의 더위는 일찍이 '대구 명물'로 일컬어졌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여름에 섭씨 37~38도의 불볕더위가 이어졌다. 대구부민들이 땀 주사를 맞았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그러자 더위는 좋지 못한 대구의 명물로 입에 오르내렸다. 그 시절에는 지역의 특산물이나 이름난 사물 외에도 좋든 싫든 반복되면 명물이라는 말을 곧잘 붙였다. 1942년 8월 1일에는 대구 더위의 최고 기록인 40도까지 올랐다. 더위는 영락없이 대구 명물이었다.

국민학교 쥐잡기 시상이 있었던 그날 신문에는 '포항 해수욕행 회원모집 중'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신문사가 수익사업의 일환으로 남녀 약 50명의 피서객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8월 14일 토요일과 일요일을 끼워 2박 3일의 일정으로 회비는 여행과 식비를 포함해 1천 500원이었다. 당시 쌀 한 말 가격이 1천 원을 넘나들었던 것과 비교하면 결코 싼 비용은 아니었다. 해수욕장에서 각종 여흥 대회가 열린다며 피서객의 참여를 부추겼다.

피서객은 대구역에서 열차를 이용해 포항으로 향했다. 철도는 이미 1918년 포항과 경주 구간에 이어 1935년에는 경주역 이남 구간이 개통되었다. 그 이후 한때는 대구~포항 간 피서 열차가 운행될 정도로 대구 사람들에게 포항 해수욕장은 익숙한 피서지였다. 살림이 팍팍하고 전염병이 번져 쥐잡기를 했을망정 피서지가 문 닫는 일은 없었다. 역대급 폭염이 찾아왔던 올여름 피서도 사실상 끝났다. 민생고의 고통 속에 말라리아 경보가 발령됐고 코로나19 환자도 늘었다. 여름의 평행이론인가.

박창원 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
박창원 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

박창원(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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