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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 호모에스테티쿠스] <42> 헤세의 ‘유리알 유희’: 유희의 아름다움

이경규 계명대 교수

이경규 교수
'유리알 유희' 관련 유리구슬 이미지. 클립아트 코리아.
이경규 교수

'유리알 유희'는 헤세의 소설 중에 가장 두껍고 난해한 작품이다. 분량이 방대하고 텍스트의 구성이 복잡하다.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논문(Betrachtung) 한 편을 독파해야 한다. 이야기가 끝나도 끝이 아니다. 책 뒤에는 주인공이 썼다는 시와 중편 소설이 부록처럼 붙어있다. 그러나 '유리알 유희'를 읽는데 가장 혼란스럽고 걸림돌이 되는 것은 분량이나 구조가 아니라 도무지 유리알 유희의 실제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일단 헤세 자신이 유희의 실제적인 양상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유리알 유희의 기원이나 목적을 설파하는 데만 집중한다. 유리알 유희의 기원은 부분적이지만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유희의 목적은 현대로 오면서 심각해지는 사회 분열과 갈등, 그리고 인간성 상실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고 한다.

헤세는 현대의 학문과 예술은 오직 물질적·상업적 유용성에 복무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 본래의 전인성(Ganz Mensch)을 파괴하고 분열과 고독으로 몰고 간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인간 정신의 조화와 통일을 회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소환하는 것이 바로 유리알 유희이다. 여기에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유용성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 장대한 기획에 유희란 아이러니한 이름을 붙인 이유다. 유희, 즉 놀이는 누구나 좋아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으로 재미 외에 다른 목적이 없는 가장 순수한 인간 행위다. 유리알 유희는 조화와 통합을 지향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자체로 즐겁고 아름다운 놀이다. 그러니까, 유리알 유희는 진(眞)과 선(善)을 초월하는 미의 원리에 기반한 고도의 정신적 수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유리알인가? 유리알은 완벽한 원형의 구슬을 말한다. 한 움큼의 구슬을 방바닥에 떨어뜨리면 산산이 흩어진다. 아무리 많아도 시너지를 발휘할 수 없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연결하고 결합해야 쓸모가 있다. 물론 유희라는 말이 뜻하듯이 유리알 유희는 어떤 물질적 가치로서의 보배와는 무관하다. 더 나아가 헤세는 이 구슬을 산산이 분화된 현대의 학문·문화·종교의 등의 진수를 담은 기호에 대한 상징으로 바꾼다. 이 기호를 모아 통합하고 조화롭게 체계화하는 것이 현대의 유리알 유희가 된다. 이 기호는 악보나 수학 공식처럼 특정 언어를 넘어 만인을 연결하는 신적 언어(lingua sacra)나 마찬가지다.

학문과 예술의 본질과 진수를 뽑아 악보처럼 기호화하는 일이나 그것을 모아 통합하는 유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국에서 영재나 천재를 뽑아 수십 년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가능하다. 바로 이 일을 하는 곳이 카스탈리엔이라는 교육국이다. 여기에 들어온 인재들은 평생 공부하고 연구하며 유리알 유희 연기자로 산다. 이들은 세상의 존경을 한몸에 받지만 유리알 유희의 순수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어떤 사회적 역할도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카스탈리엔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카스탈리엔 역사상 가장 탁월한 유희 명인의 일대기를 추적한 것이 소설 '유리알 유희'다. 그가 최고의 명인이 되어 유희를 집전하는 모습이 한 번 나오는데 이것을 보면 유리알 유희의 실제 모습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대사제처럼 금빛 옷을 입고 많은 개별 분과의 명인들과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행사를 집전하는 모습은 거대한 종교 축제를 방불케 한다. 명인은 자기 앞에 놓인 칠판에 준비한 작품을 펼치는데, 황금 석필로 기호를 써 내려간다. 그러면 이것은 뒤에 있는 거대한 화면에 수백 배로 확대되어 나타나고 대표자는 그것을 큰 소리로 낭독한다. 축제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홀린 듯 속삭이고 그것은 다시 송신기를 타고 세계 곳곳에 있는 유희 참석자의 귀에 전달된다. 참석자들은 모두 깊은 명상에 잠기며 정신의 총체적 합일을 경험한다. 이 유희는 1주일 이상 계속되는데 참여자들의 개성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작용할 수 있지만 그들의 정신이 정화되고 고양되는 데는 차이가 없다.

말하자면, 유리알 유희는 거대한 미학적 사건이다. 이것은 유희 명인 크네히트의 말에 잘 드러난다. "그것은 너무 아름다워(allzu schön) 두려움 없이는 도무지 관찰할 수가 없다." 두려운 경지의 아름다움은 숭고하고 압도적인 힘이 된다. 릴케도 아름다움에 대해 비슷한 말을 한 바 있다. "아름다움은 겨우 견딜 수 있는 전율의 시초(Anfang des Schreckens)다." 헤세에게 이런 아름다움은 시각적이라기보다 음악적이다. 즉, 유리알 유희는 분열된 모든 것을 통합하는 음악적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신비한 놀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누가 봐도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황당한 이상이다. 먼 미래에나 생각해 볼 수 있는 상상이다. 소설의 배경이 지금으로부터 200년도 더 뒤인 23세기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미래에도 유리알 유희와 카스탈리엔은 "인공적이고 살균된 세계"라는 비판을 받는다. 심지어 카스탈리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유희 명인인 크네히트로부터 부정당하는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소설의 포인트와 반전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는 유희 명인이라는 엄청난 명예와 권한을 한순간에 내려놓고 한 시골 아이의 가정교사가 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 아이와 시골 호수에서 수영하다가 익사하는 것이 소설의 끝이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결말에 많은 해석과 상상력이 요구되지만 카스탈리엔의 인공적 미학이 부정되면서 자연 미학이 대두되는 장면이다. 요컨대 '유리알 유희'의 서사는 현대의 자본주의적 생산 미덕과 유용성 제일주의에 대항하여 지극히 정신적이고 순수한 유희 미학을 내세웠다가 다시 자연 미학으로 돌아가는 일련의 변증법적 수순을 밟는다. 다만 마지막 부분이 너무 짧게 처리되어 있어 아쉬움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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