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크루즈 여행

김수용 논설실장
김수용 논설실장

학창 시절 주워들은 이야기 중 하나가 은퇴한 서양인들의 평생 소원이 세계 일주 크루즈 여행이라는 말이었다. 호화 유람선을 타고 수개월간 세계 곳곳을 누빈다니 가슴 설레는 꿈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이나 유럽의 노인들은 은퇴를 앞두고 여행 경비를 모아 부부가 함께 크루즈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부자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은퇴 자금을 여행 경비로 써 버리면 무슨 돈으로 먹고사나 궁금해졌다. 그때 접한 단어가 '연금(年金)'이었다. 20~30년 근속하면 죽을 때까지 매달 일정액이 나오는데, 호화와 궁핍(窮乏) 사이의 생활은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국민연금이 시작됐다. 매월 푼돈 정도만 꾸준히 모으면 퇴직 후 월급 못잖은 연금이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2024년 현재 국민연금을 믿고 퇴직금을 톡톡 털어 세계 일주를 떠나는 사람은 없다. 200일이 넘는 크루즈 여행은 여러 경비를 포함하면 1인당 1억원쯤 된단다.

올해 고령층 취업자와 창업자 비중이 동시에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크루즈 여행을 그리던 베이비부머들은 일자리를 그리워한다. 올해 1~7월 월평균 60세 이상 취업자는 639만9천 명으로 전체 취업자의 22.4%를 차지했다. 사상 최대다. 40년 전인 1984년엔 5.4%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4배 넘게 비중이 커졌다. 올해 1∼5월 60세 이상 창업 기업(부동산업 제외)은 6만5천 개로 전체의 13.6%를 차지했는데, 이 수치도 역대 최고다. 노인들이 살기 힘들어져서 취·창업이 늘어났고, 전체 인구가 고령화한 이유도 있다. 전체 인구 중 60세 이상은 1천424만여 명으로 27.8%를 차지한다.

지난 10일 세계 최대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월트 디즈니가 크루즈 4척 추가 건조(建造) 계획을 밝혔다. 크루즈선 한 척을 만드는 데 10억~20억달러(1조3천억~2조6천억원)가 든다. 천문학적 투자에 나선 이유는 크루즈 산업이 호황(好況)이어서다. 올해 크루즈 승객은 3천570만 명으로,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보다 6%가량 늘었다. 불안한 국민연금에 노후를 의탁(依託)하지 못해 취업을 걱정하는 노인들도 한때 크루즈 여행을 꿈꾸던 낭만 청년들이었다. 하기야 여행, 취업은 희망적인 바람이고, 아파도 치료조차 못 받을까 걱정인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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