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재목의 철학이야기] ‘영부인’은 누구인가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자주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 중 하나가 '영부인(令夫人)'이다. 영부인이란 '대통령의 부인'을 말한다. 영어로는 '퍼스트 레이디'로 사회에서 지도적 지위를 갖는 여성을 가리킨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국모(國母)라 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이렇게 표현하지 않는다.

법으로 명시된 것은 아니나 일반적으로 영부인은 대통령의 해외순방 시 동행하고 국내외 귀빈을 접견하며 여러 분야에 걸쳐 대외적인 활동을 한다. 특히 대통령의 손길이 닿지 못한 소외된 곳을 찾아서 위로하고 보살피는 데 내조한다. 이처럼 영부인의 자리는 대통령이라는 아우라를 돕고 빛내는 역할을 하기에 나라의 품격 즉 국격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인이다. 비유하자면 부처를 양옆에서 모시는 협시보살처럼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영부인은 다른 사람의 부인을 품위 있게 부를 때 쓰는 일반명사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대통령의 부인에 한정하여 사용하는고유명사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영부인은 일반인의 배우자가 아닌 국가 원수의 부인을 가리키기에 정치적 신체에 대한 극존칭이다. 그런 만큼 말 자체로 이미 그 권위와 예우를 시사한다.

영부인을 'OOO씨'라 하지 않고, 격을 높여 'OOO 여사'라 호칭하는 것도 그 이유이다. 가끔 신문 기사에 '대통령 부인 OOO씨'라 표기한 것은 일반인과 동격화하여 친근감을 표현하는 점도 있겠으나 한 마디로 폄하를 의미한다.

한번 생각해보라! 자기 부모나 선생, 직장의 상사를 앞에다 두고 보통 "OOO씨"라 부르는가? 당 대표를 두고 "OOO씨"라 부르고 있는가? 그 경우엔 바로 '결례!'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 동아시아 문화권의 관례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호칭부터 어그러진다. '나는 누구인가'는 '어떻게 불리는가'에 달려 있다. 호칭이 그 사람을 결정한다. 호칭의 분열에서 그 사회의 분열상을 읽을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부인(夫人)'에 대해 설명을 보탠다.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고관이나 귀인의 아내를 보통 '부인(夫人)'이라 불렀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남의 아내와 자신의 아내를 높여 부를 때도 사용하게 되었다. 일찍이 『논어』 「계씨」에는 "임금의 아내를 임금이 부를 때에는 '부인'이라 하고, 부인이 스스로 부를 때는 '심부름하는 작은 아이(小童)'라 한다"고 했다.

이 당시에도 명칭의 혼란이 있었기에 이런 기록이 남은 듯하다. 한 가지 눈에 띄는 대목은 임금의 부인은 스스로를 낮추는 게 미덕이었던 점이다.그렇다고 "부인은 다른 사람에게 엎드려서 사는 것이다(婦人服於人)"처럼, 무작정 남편에게 굴복하며 산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전통 시대를 둘러보라. 녹문 임성주의 여동생 임윤지당은 "남녀가 비록 가는 길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은 같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등 여자도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갈암 이현일의 어머니로 『음식디미방』을 남긴 장계향도 "여성도 자신을 잘 닦으면 성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며 당당하게 살았다. 여성이라 해서 굴종의 시대를 견딘 것만은 아니다. 남편을 가르치고 사회의 모범이 된 훌륭한 여인들, 여성 철학자들이 동서양에 많았다.

영부인은 '부인'이라는 말에다 '영(令)' 자를 더한 것이다. 더했다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다. '영'은 부인과 마찬가지로 남을 높일 때 쓰는 말이다. 예컨대 남의 부인을 '영실(令室), 영규(令閨), 영정(令正)', 남의 딸은 '영애(令愛), 영녀(令女), 영양(令孃)'이라 했다. 그렇다면 영부인은 존칭에다 존칭을 더한 '극존칭'인 셈이다.

마치 불교에서 보살 중에서도 큰 보살을 '보살마하살'이라 하듯, 영부인은 '높고 귀한 부인'이란 뜻이다. 이렇듯 호칭은 인물에 대한 형식만이 아니라 내용을 획정해준다. 그러므로 그에 걸맞는 품격을 스스로 갖춰야 함과 동시에 남들 또한 그에 합당한 예우를 해주어야 한다는 쌍방적 약속을 담는다.

요즘 세간에 떠도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엔 두 사람만 없으면 조용해진단다. 한 사람은 영부인이고, 또 한 사람은 야당 대표란다. 정치인이야 어차피 그런 물에 노는 사람이라 치자. 현직 대통령을 내조할 영부인이 명품 가방 등 좋지 않은 일로 시도 때도 없이 뉴스에 오르내리는 건 참 불편한 일이다. 물론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혼자 타지마할로 간 지난 영부인에 대한 것도 매한가지이다.

법리적 검토와 인간적 이해가 혼동되나, 어쩌랴. 애당초 우리는 대통령을 뽑은 것이지 영부인을 뽑은 것이 아니다. 더구나 평범한 사람이 어쩌다 대통령 남편 덕에 영부인이 된 것뿐이다. 싫든 좋든 간에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얼굴이 된 바엔 못마땅하더라도 받아들여야 옳지 않은가. 어느 영부인인들 마찬가지다. 애써 그 얼굴에 침을 뱉고 상처 낼 필요는 없다. 관점을 바꾸면 그 얼굴들이 결국 내 얼굴과 연결돼 있다.

남을 향한 손가락과 입으로 자신의 허점과 부족함을 더 질책하는 성찰적 내면을 가졌으면 한다. "그만 해라, 됐다!"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비판할 여력이 있다면, 민생 대책에 더더욱 혈안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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