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도, 경술국치 114주년 추념 "아픔의 역사 가슴 속 깊이 아로 새겨야"

경북도, 광복회원·보훈단체 등 250여명 참석 추념행사 개최
경술국치에 안동인 향산 이만도 등 자정순국 통해 일제 항거

경상북도는 8월 29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왕산관에서 순국선열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나라 사랑 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제114주년 경술국치 추념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경북 광복회원을 비롯해 김민석 경북도 정책실장, 이용수 경북북부보훈지청장, 보훈 단체장 등 250여 명이 참석했다.

경북도는 경술국치 114주년 추념 행사를 통해 민족의 국권을 일제에 빼앗긴 아픔의 역사를 잊지 않고 목숨을 기꺼이 헌신한 독립 유공자추념행사와 애국지사, 순국선열의 숭고하고 위대한 애국정신을 기리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김민석 경북도 정책실장은 추념사에서 "경술국치는 일제에 의해 우리의 국권을 빼앗긴 날로, 국권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우리 선조들의 크나큰 헌신이 있었다"며 "경술국치라는 아픔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가슴 속 깊이 아로새겨, 독립 유공자와 애국지사, 순국선열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리는 사업 확대에 더욱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한일 강제 병합 후 왕족과 대한제국 친일 대신들이 덕수궁 인정전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한일 강제 병합 후 왕족과 대한제국 친일 대신들이 덕수궁 인정전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대한제국 마지막 어전회의

1910년 8월 29일. 순종은 이날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제에 넘겨주게 됐다고 발표했다. 순종은 황제 즉위 사흘째 되던 날, 조선 500년 사직을 이어갈 막중한 책임을 자신의 '부덕'을 탓하며 일제에 넘겨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차례 노력했음을 강변했다. 순종은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됐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도저히 만회할 시간이 없고 방책을 찾을 수 없음을 탄식했다.

순종은 이날 종묘사직을 일본제국주의 손아귀에 넘겨주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민족은 나라 잃은 백성으로 전락해 버렸다. 한반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됐다.

앞서 1910년 8월 22일 오후 1시.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興福軒)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는 일제 데라우치 통감이 사전에 건네준 '한일병합조약안'을 체결하는데 필요한 '전권위임에 관한 조서'에 순종의 재가를 받아내는 자리였다.

이날 순종과 고종의 거처인 창덕궁·경운궁을 비롯해 서울 안팎의 요지에는 2천600여 명의 무장한 일본군과 헌병들이 배치됐다. 이처럼 계엄과 다름없는 살벌한 상황 아래에서 순종은 전권위임장에 서명했다.

이완용은 순종에게서 받아낸 전권위임장으로 데라우치 통감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일제는 한국을 강탈한 뒤 한국민의 거센 반발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를 바로 발표하지 않았다.

8월 26일에 조약을 공포할 예정이었으나 그 다음 날이 순종의 황제즉위일이란 점을 고려해 29일 발표했다.

◆선비들의 마지막 선택 '자정순국'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나라를 따른다.' 일제 통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한민족의 가장 극렬한 저항이 곧 목숨을 끊는 '자정순국'(自靖殉國)이었다.

경술국치 과정에서 전국 70여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절했다. 음독하거나 목을 맨 이도 있었으며 물과 음식을 끊어 '단식'이라는 가장 처절한 항거도 있었다.

유교적 삶을 살면서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며 명문거족이 많았던 안동문화권 사람들의 나라사랑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단연 빛났다.

나라 잃은 분노에 전국에서 자정순국이 줄을 이었고, 1910년에만 38명이 순절했다. 이 가운데 안동인 향산 이만도의 자정순국은 동은 이중언 등 안동인들의 순국의 물결을 이끌어냈다.

이 사건은 안동인 김대락과 이상용, 김동삼 선생이 눈 내리는 엄동설한에 남부여대(男負女戴)의 행렬을 이끌고 만주벌판으로 떠나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향산 이만도 선생은 "을미년 국모 시해 사건에 한 차례 죽지 못했고, 을사늑약 때 두 번째로 죽지 못했다. 산으로 들어가 구차스럽게 생명을 연장했던 것은 오히려 기다림이 있어서였다. 이제는 희망이 끊어졌다. 죽지 않고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라며 단식을 실천했다.

향산의 집안 조카였던 동은 선생은 '가슴에 품은 칼날 같은 마음 그 누가 풀어줄 수 있으랴. 하늘마저 이미 끝나고 말았으니 죽지 않고서 무엇을 또 할까. 내가 죽지 않고 있으니 향산 옹이 빨리 오라 재촉하네'라는 '술회사'(述懷詞)를 남겼다.

경북 안동시 예안면 인계리(옛 청구동) 도로변에 조성된
경북 안동시 예안면 인계리(옛 청구동) 도로변에 조성된 '향산공원'에는 향산 이만도 선생의 자정순국의 의지가 고스란히 전해오고 있다. 매일신문 D/B

◆안동인들의 순국 잇따라

경술년 국치 이후 향산의 자정순국은 안동권 사람들의 순국을 이끌었다. 향산이 순국하기 하루 전이었던 10월 9일, 와룡 살던 권용하가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절명했다.

향산이 순국하던 날 집안 조카였던 이중언이 단식에 나서고, 9일 뒤인 10월 19일 봉화 이면주가 음독 순국했다.

풍천의 이현섭도 단식해 11월 26일 순절했다. 풍산의 소산 김택진도 단식 대열에 동참해 11월 28일 만 36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향산의 제자 벽산 김도현은 1914년 12월 23일 영덕 대진 바닷가로 걸어 들어가 순국했다.

이후 1919년 3월 3일, 3·1만세운동 때는 1910년 국망의 해 11월 27일 단식 순절했던 류도발의 아들 류신영이, 1921년 1월 27일 광무황제 대상 다음날인 28일에는 이명우·권성 부부가 음독 순국했다. 이들은 '의'를 걸었던 향산을 따라 '의리'와 '저항'을 죽음으로 보여줬다.

퇴계 이황의 11세손 향산 이만도의 죽음을 전해주는 '청구일기'(靑邱日記)와 '향산이선생순국유허비'(響山李先生殉國遺墟碑)가 그의 죽음의 의미와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청구일기'는 향산이 대한제국이 망한 뒤 청구동에서 24일간 단식하다 순국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것. 여기에는 거듭 음식을 권하는 며느리에게 '물 한 잔을 가져오라' 해 마셔 며느리에게 자책감을 덜어줬고, 집안 손자인 국호에게 옛 학문인 성리학을 지키라고 당부해 신교육에 대한 우려를 나타낸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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