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9월 17일 추석날. 새벽 바람이 수상쩍더니 차례상을 후려치는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이날 새벽, 제주를 휩쓸고 통영에 상륙한 제14호 태풍 '사라'. 오후 들어선 경북을 표적 삼아 무섭게 내달렸습니다. 대구·청도·경산, 영천·경주·포항, 안동·청송·영덕을 지나 울진까지 초토화. 도처가 눈 뜨고 볼 수 없는 '물지옥'이었습니다.
이날 오후 8시,대구 동촌 아양교는 이미 위험 수위. 날이 밝자 유원지 점포와 가옥 50여 동이 몽땅 떠내려갔습니다. 신천 상류 파동, 검단·서변·불로동 제방은 간데 없고, 신암·산격·북비산 저지대는 물바다로, 달서천이 역류한 원대동 일대 논밭은 황톳빛으로 잠겼습니다.
영천에선 17일 오후 2시쯤 금호강 물이 영천교 남쪽 제방을 타고 넘었습니다. 놀란 주민들이 우르르 영천역까지 도망 왔지만 강물도 뒤쫓아 들이쳤습니다. "이거 큰일이다." 영천역 조역(助役) 임경현 씨는 기관차에 화물 열차 20량을 달아 주민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왕복 세 번으로 2천400명이나 구했습니다.
18일 영천 금호면(읍)에선 익사자가 13명. 이날 정오 현재까지도 물에 잠긴 진량·안심 일대에선 경찰 보트가 고립자를 구하느라 이리저리 바쁘고, 하늘에선 헬리콥터가 뿌린 구호식량, 건빵 봉지가 쏟아졌습니다. 경산 고산(현 시지) 저지대도 침수돼 고산지서 이종능 경사는 나룻배 하나로 주민을 76명이나 살렸습니다.
월성(경주)에선 외동 입실천, 천북 신당천, 안강 칠평천 등 물길이 죄다 터져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큰물, 형산강이 범람한 강동면 일대는 3천여 가옥이 물밑으로. 강둑 옆 낙산리(현 오금1리)는 마을이 통째(가옥 57호 유실) 잠겼습니다. 태풍과 해일이 쌍으로 덮친 포항 해도동 일대에서도 침수 가옥이 6천여 호에 달했습니다.
안동 용상동 주민들은 추석날 오후 5시쯤 반변천 물이 선어정 산등을 넘는 걸 똑똑히 보고는 하얗게 질렸습니다. 용상동 일대는 순식간에 쑥대밭, 산 너머 와룡국교도 휩쓸려 한동안 안동에선 '용자 든 이름은 짓지 말라'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영양의 곡창지대 영양면(읍) 현1,2동 들판도 자갈밭으로, 청송은 외지로 가는 도로가 싹 끊어지고 석유·양초까지 동나 고립무원. 진보로 통하는 길을 뚫는다고 이유백 파천면장부터 어린아이까지 지게로 꼬박 나흘간 돌을 날랐습니다.
영덕 강구항은 말 그대로 물지옥이었습니다. 청송·영일(포항)·영덕에서 50개의 내가 모여든 오십천 강물이 해일과 부닥치며 수위를 8m나 올려 강구 시가를 삼키고 20t급 발동선 6척을 10m 절벽 위 국도로 내동댕이쳤습니다.
순식간에 거지꼴로 오들오들 떨며 차가운 밤 바다를 서성이는 5천여 강구 이재민들…. 상인 신동휴 씨가 추석 대목을 본 400만환이 든 궤짝, 1억5만환이 든 동해수산(대표 김원규) 금고도 못 건지고 다 떠내려 갔습니다. (매일신문 1959년 9월 19일~9월 27일 자)
태풍이 빠져나간 길목, 울진에서는 초가지붕이 물에 둥둥. 근남·기성·온정·평해까지 다 쓸고 갔습니다. 오갈 데 없는 66세대 300여 주민들은 이듬해 4월, 정부 주선으로 휴전선 아래 불모지, 철원으로 눈물을 훔치며 집단 이주했습니다.
사망·실종 280명(전국 849명), 부상 1천277명(전국 2천533명), 이재민 40만8천83명, 구호대상자 19만9천201명(1959년 9월 28일 집계 경북 인명 피해). 평균 초속 45m(최대 초속 85m), 한나절만에 150mm가 넘게 내린 폭우에 재산 피해는 말도 못해 복구에는 처음으로 군 병력이 동원됐습니다. 해방 후 이보다 더 무서운 태풍은 없었습니다.
1959년 그날, 고향 진주에서 명절 휴가 중이던 신정식 상등 해병은 교통 두절에도 가야 한다며 포항까지 500리길을 4일 동안 걸어서 기어이 제시간에 귀대했습니다. 물지옥 속에서도 살아야 한다고 악착 같이 헤쳐 나온 형님·누이, 아버지·어머니들…. 모두가 '상등 해병'이었습니다.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아내 1심 선고 직전 "죽고 싶을 만큼 미안…혜경아, 사랑한다"
수능 여파? 대구 수성구 '국평' 16억원 거래…범어동 최고가 3년 만에 회복
文 "남북 대결 지속되면 '한국 패싱' 가능성…尹, 대북정책 전환해야"
권성동 "이재명 대표, 대선 출마 못할 겁니다"
[시대의 창] 자아와 메타자아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