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거대한 뿌리, 구미] <5> 구미공단의 탄생, 산업화의 초석

박정희 시대 100억달러 수출 첨병…근대·반도체 코리아의 심장

우리나라의 수출실적이 100억 달러에 달성한 것을 기념해서 구미공단 입구에 건립한 수출탑.
우리나라의 수출실적이 100억 달러에 달성한 것을 기념해서 구미공단 입구에 건립한 수출탑.

◆공돌이와 공순이의 탄생

1970년대는 '공돌이'와 '공순이'의 전성시대였다. 공장에서 일하는 블루칼라노동자들을 당시 공돌이, 공순이라고 비하해서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대한민국을 산업화시킨 '산업역군'이었고 수출주역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전 세계를 무대로 '메이드인코리아'를 판 종합상사 '상사맨'도 존재할 수 없었다.

수출전진기지로는 '구로공단'이 가장 먼저 생겼고 인천 남동공단, 마산수출자유지역이 조성되었고 마침내 내륙도시에선 구미에 대규모 산업단지가 조성됐다. 구미공단은 그렇게 탄생했고 구미에도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들인 공돌이, 공순이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대한민국을 산업화시킨
대한민국을 산업화시킨 '산업역군'이었고 수출주역인 공돌이, 공순이.

1977년 12월 22일 오후 4시, 우리나라 수출실적이 사상 최초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수출입국'(輸出立國)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진흥 확대회의'를 160여 차례 직접 주재하는 등 온 나라를 수출전선에 내세운 지 13년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2023년 우리나라 총 수출실적은 6,326.9억 달러. 주요 수출 품목은 자동차와 반도체 선박 일반기계 등 고부가가치제품일색이다. 수출입 등 무역규모로는 세계 7위의 경제대국 위상을 당당하게 유지하고 있다. 박정희대통령이 집권하기 직전인 1960년 1인당 국민소득 83달러의 아시아 최빈국에서 2024년 일본을 제칠 정도로 한국경제는 세계속에 우뚝 섰다. 그 중심에 '구미공단'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수출실적이 100억 달러에 달성한 것을 기념해서 구미공단 입구에 건립한 수출탑.
우리나라의 수출실적이 100억 달러에 달성한 것을 기념해서 구미공단 입구에 건립한 수출탑.

◆'구미 수출탑'은 수출 100억 달러 기원

구미IC를 통해 구미시내에 들어서 이마트로 가기 직전에 회전교차로, 즉 '로터리'를 만나게 된다. 로터리 중간에 '수출탑'이 우뚝 서있어 수출탑로터리'라고 불리는 구미시의 도로원표 기준이다. 로터리 한가운데에는 40m 높이의 단순한 형태의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얼핏 보면 어느 도시에나 있는 특징없는 현충탑과 다를 바 없지만 '수출탑'이다.

우리나라의 수출실적이 100억 달러에 달성한 것을 기념해서 건립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수출실적이 100억 달러를 달성한 것은 수출탑이 건립된 1976년이 아니라 1년 후인 1977년이다. 당시 '100억 달러 수출, 1000달러 국민소득 , 전 국민 마이카 시대'라는 구호의 고 신동우 화백의 그림은 전국에 벽화형태로 도배를 했고 우리는 달콤한 꿈을 꾸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루기 어려운 장밋빛 꿈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허황해보이던(?) 100억 달러 수출의 꿈이 목표연도보다 3년 일찍 성사됐고 그보다 1년 전에는 100억 달러 수출을 바라는 수출탑이 '바벨탑'처럼 구미공단 입구에 세워진 것이다. 수출탑 전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수출산업의 탑'이라는 휘호가 새겨져있다.

대한민국을 산업화시킨
대한민국을 산업화시킨 '산업역군'이었고 수출주역인 공돌이, 공순이.

박 대통령을 비롯한 온 국민의 수출을 통해 나라를 세우자는 수출입국의 소망이 이 탑에 담겨있는 셈이다. 그리고 1년 만에 우리는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고 한국경제는 비약적 도약을 거듭했다. 이 수출탑은 얼마 전 경북도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구로공단'이 생기면서 간절한 우리의 수출입국의 꿈을 꾸게 되었고 구미와 마산과 창원이 있어서 그 꿈이 실현됐다. 어제의 구미공단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경제성장 드라마는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신화다. 석유와 광물 등의 부존자원도 변변찮고 숙련되고 교육받은 인재도 부족한 독립 신생국이 6.25라는 동족상잔의 전쟁 참화까지 겪었음에도 개발도상국·중진국 딜레마를 넘어 선진국 문턱을 넘어선 것이다. 그래서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문화대혁명의 암흑기를 거친 중국도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성장에 올인하면서 대한민국의 외자도입을 통한 성장과정을 그대로 도입했다. '박정희패러다임'을 그대로 따라했다.

현재의 공단본부앞 도로전경
현재의 공단본부앞 도로전경

수출 100억 달러 목표가 달성된 그날, 분식과 혼식을 강제하던 박정희 정부는 '쌀 막걸리'를 마실 수 있도록 했다. 수출기업은 애국기업이었고 수출입은행은 종합상사에 대한 사실상의 무한보증을 했다. 깻잎과 은행잎, 부녀자들의 머리칼을 잘라서 만든 가발, 김과 수산물 합판 등으로 시작한 우리 수출은 신발과 우산, 안경 소비재, 합섬과 면직 등 섬유제품을 거쳐 마침내 철강과 조선, 자동차 등 중공업제품으로 수출품목을 전환시키면서 이뤄낸 쾌거였다.

100억 달러 수출을 통해 전 세계 133국에 '메이드인코리아'(made in KOREA)가 새겨진 1천200여 품목으로 연간 42.4%라는 수출신장율을 통해 기적과도 같은 수출입국 신화를 만들어냈다. 박정희 집권이 시작된 직후인 1964년 우리나라 수출은 1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13년 만에 우리는 100배의 수출실적을 이끌어냈다. 초기에는 '동명목재'가 있었고 가발수출의 대명사인 '서울통상'이 있었고 월남전을 통해 성장한 '한진상사'가 있었다. 보세가공을 통한 섬유수출은 한일합섬과 선경, 코오롱 효성 등의 섬유재벌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구미공단은 수출품목을 전자제품으로 전환

그러나 구미전자산업단지 조성은 우리 수출전선의 주력제품을 전자제품으로 탈바꿈시키게 되는 계기가 됐다. '수출입국', '수출은 국력의 총화', '전 산업의 수출화', '전 세계의 시장화' 등 마치 북한의 선전선동구호와 다를 바 없는 박 대통령이 수출 독려용 휘호는 전국에 내걸렸다.

물론 100억 달러 수출의 초석은 '구로공단'이 마련했다. 5.16을 통해 권력을 잡은 군부는 보세가공으로 성공한 싱가포르와 대만 등을 모델로 한 수출산업단지를 조성하기로 했고 그 첫 단추가 구로공단이었다.

구미공업단지 기안서.1969년 1월
구미공업단지 기안서.1969년 1월 '구미공업단지 설립추진대회'가 열렸고 6월 건설부 고시로 공업단지 사업시행자를 지정함으로써 구미공단이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한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 구미에 대규모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것을 정치적으로 껄끄러워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고향에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특혜로 비칠 것을 우려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구로공단 등을 조성해서 운용한 후 울산과 청주 마산 등지에 공단을 조성한 이후 구미공단 조성에 동의했다.

정작 구미공단 조성에 앞장선 것은 당시 경북도지사 양택식과 구미지역 유지 장월상 그리고 구미가 고향인 재일교포실업가 '곽태석' 한국도시바사장 등이었다. 양 지사는 포항지역에 공단을 조성하려고 했으나 구미지역 상공계 인사들과 곽 사장 등이 구미유치를 설득하자 마음을 돌렸다.

1969년 1월 '구미공업단지 설립추진대회'가 열렸고 6월 건설부 고시로 공업단지 사업시행자를 지정함으로써 구미공단이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한다. 당초 구미공단은 경북도가 주체가 된 '지방공단'과 전자업종을 중심으로 한 한국전자공업공단으로 이원 조성됐다.

구미 1공단은 1969~1973년 입주를 마쳤고 1977~1981년 2공단, 1987~1995년 3공단을 조성하는 등 3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공단규모를 확장하면서 성장을 거듭한 다른 산업단지와 다른 특징이 있다. 구미공단은 박정희 시대 100억 달러 수출목표를 달성하면서 '수출입국'의 영광을 만드는데 기여한 조국 근대화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였으며 '반도체코리아'의 초석을 놓았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대표)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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