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칼럼] 딥페이크 범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김수용 논설실장
김수용 논설실장

서울대 졸업생들이 동문 여성의 얼굴을 합성한 가짜 음란물을 제작·유포한 '서울대 딥페이크'(서울대 N번방) 사건의 공범에게 얼마 전 법원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허위 영상물 내용은 입에 담기 어려운 역겨운 내용,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 채 스트레스 풀이용으로 도구화하며 피해자의 인격을 몰살(沒殺), 기록을 남기기 위해 소셜미디어(SNS)에 게시하는 현대인의 일상적 행위가 범죄 행위의 대상으로 조작' 등 판결문을 통해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 주었다. 이들은 2020년 7월부터 올해 4월까지 상습적으로 허위 영상물 400여 개를 제작하고 1천700여 개를 유포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는데, 주범에 대한 재판은 진행 중이다. 일상의 기록이 음란물로 둔갑하면서 피해자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됐다.

인공지능(AI)을 악용해 실제 얼굴을 음란물과 합성한 딥페이크 영상물로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가해자는커녕 피해자 범위도 확정할 수 없을 정도다. 중·고교생 등 미성년자뿐 아니라 교사, 여군 등도 포함됐고, SNS에 떠도는 '피해 학교 명단'만 100곳이 넘는다고 한다. 진원지(震源地)는 텔레그램이다. 다른 SNS보다 높은 보안성·익명성이 특징이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다. 가입자가 10만 명을 훌쩍 넘기는 텔레그램 딥페이크 채널도 있는데, 특정 얼굴 사진을 올리면 몇 초 만에 나체 사진에 얼굴을 합성한 음란물이 올라온다. 피해자는 자기 사진이 성범죄 대상이 되는지도 모르고, 가해자들은 죄의식조차 없이 '장난'을 즐기고 있다.

당국이 엄벌을 천명(闡明)했지만 가해자들은 오히려 비웃고 있다. 외국에 서버를 둔 텔레그램 특성상 수사가 어렵고, 꼬리를 잡힐 것 같으면 대화방을 폭파해 버린다. 영상물과 활동 내용이 순식간에 사라져 증거 확보가 불가능하다. 주범 조주빈의 'N번방 사건'을 밝힌 '추적단불꽃'은 경찰과 협조해 가해자 신상, 범죄 행위와 유포 장면 등 증거를 확보했는데, 1년 이상 잠입 취재 끝에 이뤄 낸 결과다. 디지털 성범죄 단속은 치밀하고 끈질긴 추적이 필요하다. 딥페이크 성 착취물에 가장 취약한 국가는 한국이라는 보고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 사이버 보안 업체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딥페이크 성 착취물 피해자의 53%가 한국 연예인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가짜 성 착취물을 생성·유포하는 텔레그램 기반 네트워크 적발은 한국이 전 세계적 문제의 진앙"이라고 꼬집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정부가 허위 영상물 소지·구입·시청 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을 새로 만들고, 딥페이크물 제작·유통 처벌 기준을 높이는 법률 개정을 추진한다. AI 기술을 악용한 사진이나 영상 등 생성물을 통제할 법안들이 21대 국회에 발의됐지만 자동 폐기되고 말았다. 22대 국회에 재발의된 '인공지능 산업 육성 및 신뢰 확보에 관한 법률안'은 AI 생성물에 '가상 정보'임을 알리는 표식(表式)을 의무화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딥페이크 식별 자체가 어렵고, 기업이 아닌 개인에게 강제하기가 불가능해서다. 기술 개발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 주고 있는 딥페이크 성 착취물은 AI를 악용한 범죄의 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가짜 뉴스, 보이스피싱, 여론 조작 등에 진위를 파악하기 어려운 딥페이크가 얼마든 동원될 수 있다. 제도가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는 시대다. 딥페이크의 무서움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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