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향래의 소야정담(小夜情談)]저 강은 알고 있을까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정희성 시인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노동의 가치를 요즘처럼 중시하지 않았던 지난 시절의 풍정(風情)이다. 그래서 노동자의 비애와 고통을 저물녘 흐르는 강물에 씻어내고 있다. 부조리한 사회를 상징하듯 오염된 강물에 뜬 달을 바라보며 스스로 상처투성이의 삶을 정화하고 있는 것이다. 강은 그렇게 고단했던 하루의 일상을 씻어주며,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의 슬픔과 아픔을 위로한다.

'비 오는 낙동강에 저녁노을 짙어지면/ 흘려보낸 내 청춘이 눈물 속에 떠오른다/ 한 많은 반평생에 눈보라를 안고서/ 모질게 살아가는 이내 심정을 저 강은 알고 있다'

이미자의 노래 '저 강은 알고 있다'는 1965년 발표와 함께 크게 히트했고 이듬해에는 영화로도 만들었다. 유동일 작사, 백영호 작곡의 트로트곡으로 애달프고 서정적인 노랫말과 선율이 수많은 한국인의 시린 가슴을 쓰다듬었다.

전란으로 얼룩진 곡절 많은 현대사의 물결 속에서 오로지 가족을 위해 고단하고 눈물겨운 삶을 감내해온 여인의 삶을 누가 알아줄까. 그래서 노을이 짙어가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저 강은 알고 있다'며 스스로를 위무하는 것이다. 파란 많은 한평생 거친 세월에 등이 휘고,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에 짙은 한숨을 내쉬던, 굴곡진 여정의 말 못할 그 속사정을 저 강은 정녕 알고 있을까.

북만주 독립운동에 나섰던 지아비를 잃어버리고 강변에서 밤새워 통곡하던 여인의 호곡성을 두만강은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두만강은 스스로 눈물 젖은 강이 되어본 적이 있었던가. 두고 온 고향이 오매불망 그립던 실향민들이 북녘을 향해 목메어 부르던 한많은 대동강은 오늘도 무심히 흐르는가. 전쟁터에 나가서 돌아오지 못한 오빠를 대신해 노를 젓던 처녀 뱃사공의 쓰라린 앙가슴을 낙동강은 알고 있는가.

영욕의 민족사 그 한가운데에 있었던 한강은 알고 있는가. 강산을 휩쓸고 간 숱한 전란의 비극과 헤아릴 수 없는 이별의 아픔을... 그러한 질곡의 역사 속에서 평화로운 자연과 오순도순한 가족의 삶을 희구했던 민초들의 소망을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는 서정시로 토로한 김소월 시인의 탄식을... 겨레의 곡비(哭婢) 이미자의 노래 '저 강은 알고 있다'는 스스로 강이 된 여인의 정한일 것이다.

대중가요는 위대하다. 어떤 문화예술 장르가 뭇사람들의 가슴에 이다지도 속속들이 스며들 수 있을까. 어쩌면 이렇게 내 슬픈 심정을 구구절절 드러낼 수 있을까. 강물 따라 흘러간, 눈물 속에 떠오르는 내 청춘을 생각하면 가슴 밑바닥부터 차오르는 설움에 목이 메고 기어이 눈시울에 그렁그렁 이슬이 맺히는 것이다. 심중에 일렁이는 슬픔같은 강물을 보며 '너는 알고 있을 것'이라 자문하는 것이다.

1976년 개봉한 '낙동강은 흐르는가'라는 영화가 있었다. 한국 전쟁 당시 인민군의 탱크부대와 맞서는 국군 특공대원의 고군분투와 희생정신을 그렸다. 74년 전 8월 낙동강 방어선이 그 배경이다. 얼마나 많은 못다 핀 청춘의 넋들이 포연 속에 사라져갔던가. 낙동강은 그해 여름의 선연한 핏빛을 기억하는가. 기억한다면, 알고 있다면, 세월이 그러면 안되는 것 아닌가. 세상이 이러면 안되는 것 아닌가?

테스형! 대답 좀 해봐요. 세월이 뭐 그래, 세상이 뭐 이래...! 삶의 현장은 여전히 탁류(濁流)이고 탐욕스럽고 사악한 자들의 놀음판인데, 순박하고 선량한 사람들에게 먼저 돌아오는 것은 상처와 눈물 뿐인데, 저 강은 알고 있다고...? 시나브로 휩쓸고 지나가는 내우외환 속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스러지는 것은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인데, 멱라수에 몸을 던진 굴원(屈原)만 바보였던가?

창랑에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에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면 될 것을, 왜 혼자 십자가를 졌단 말이오? 테스형! 그러면 저승에 천국이라도 있는지 좀 알려줘요. 굴원이 덜 억울하게.... 인생의 삽자루를 메고 다시 어두워 돌아가는 저물녘 황혼길, 희뿌연 막걸리잔 위에 어리는 노랫말이 서럽다. "밤안개 깊어가고 인적 노을 사라지면 흘러가는 한세상이 꿈길처럼 애달프다"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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