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강 김규진이 1919년 6월 금강산에서 가지고 갔던 부채에 그린 '마하연 동자석'이다. 제화를 보면 '송은(松隱) 연우(硏友)'에게 선물한다고 했다. '함께 연구하는 벗' 송은은 제자인 이병직으로 김규진이 세운 서화연구회에서 서예와 사군자를 배운 서화가이자 미술품 수집가다.
김규진은 금강산을 유람하며 백운대에 오르는 도중 마하연 북쪽에 있는 이 '천연활불(天然活佛)' 같은 바위를 보자 즉석에서 붓을 들어 '진상(眞像)'을 사생했다. 바위는 굵은 윤곽선으로 간략하게 형태를 잡아냈고, 바위 좌우에는 추상적인 붓질을 담백하게 나열했다. 유람의 대상이자 관찰의 대상인 바위를 그렸으므로 '마하연 동자석'은 산수화와 풍경화의 중간쯤에 있는 작품이다.
이 동자석을 '남순동자(南巡童子)'라고 했다. 남쪽을 순례하며 선지식(善知識)을 찾는 구도자인 남순동자는 '화엄경'에 나온다. 선재동자라고도 한다. 금강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겼고 '화엄경'의 담무갈보살이 머무는 성지로 믿었으므로 동자 형상인 바위에 남순동자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 같다.
김규진은 18세 때 중국으로 가서 북경을 중심으로 10여 년간 서화를 연구했고, 귀국 후 궁내부에 근무하며 영친왕에게 글씨를 가르쳤다. 외국에서 견문을 넓혔고, 왕실과 인연이 있는 엘리트 미술인 김규진은 해외 유학파답게 선구적이었다. 1903년 천연당사진관을 열었고, 1913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화랑인 고금서화관을 개설해 작품을 전시, 판매하며 유통에도 관여했다. 1915년 3년 과정의 미술교육기관인 서화연구회를 설립했고, 서예와 사군자화 입문서인 '서법진결', '육체필론', '해강난죽보' 등 교재도 펴냈다.
서예가 김규진은 큰 글씨를 잘 썼다. 금강산 구룡폭포 바위에 새긴 '미륵불(彌勒佛)'이 대자(大字)로 가장 유명하다. 세 글자가 무려 20미터에 달해 특별한 대필(大筆)을 주문했고, 자신의 키보다 큰 이 붓을 들고 찍은 사진도 전한다.
화가 김규진은 묵죽을 장기로 했지만 산수, 영모, 화조 등도 잘 그렸다. 순종의 응접실인 창덕궁 희정당의 '총석정절경도'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가 유명하다. 벽화 같지만 벽에 바로 그린 것이 아니라 맞춤한 크기로 그려서 붙인 부벽화(付壁畵)다. 궁정화풍의 본격적인 채색화여서 화가로서도 다재다능했음을 잘 보여준다.
김규진은 만이천봉주인(萬二千峰主人)으로 호를 지으며 글씨와 그림으로 금강산과 맺은 각별한 인연을 자부했다.
일제강점기 금강산은 '관광'이라는 근대적 문화현상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부상하기도 했고, 국토의 정화로서 나라를 빼앗긴 민족을 결속시킨 심리적 기제이기도 했다.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금강산은 민족의 고난과 울분을 달래준 마음속의 이상향이었다.
미술사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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