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대의 창] 의료대란, 출구가 안 보인다

황태순 정치평론가

황태순 정치평론가
황태순 정치평론가

"한가위만 하여라!" 추석명절 때 주고받는 덕담이다. 한해의 풍년을 자축하며 넉넉한 인심이 오고 가는 여유로움이 풍겨난다. 내일부터 4박5일의 추석연휴가 시작된다.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이 얼굴을 마주한다. 그동안 미처 챙겨보지 못했던 안부도 묻고 정을 나눈다. 또 자연스럽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게 된다. 때론 얼굴을 붉히기도 하면서 여론이 형성된다. 바로 '명절 민심'이다.

"제발 아프지만 마라!" 이번 추석연휴를 맞으면서 터져 나오는 아우성이다. 화요일 국무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추석연휴 한시적으로 보험수가를 대폭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응급실 전문의 진찰료를 평소보다 3.5배 인상한다고도 했다. 부모님 보러 간다고 귀향하다가 괜히 아프기라도 하면 이런 낭패가 없게 됐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고향 부모님들이 걸어두었던 현수막이 다시 떠오른다. "불효자는 '옵니다'..."

세계 최고의 의료 시스템과 의료진 수준을 자랑하던 우리나라가 갑자기 1960년대로 되돌아가는 느낌이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의대 입학정원 증원을 둘러싼 정부와 의사들 간의 의정갈등이 기폭제다. 이젠 의료대란을 넘어서 의료공포로 변해가고 있다. 그럼에도 해결의 실마리는 가닥을 잡지 못한 채 점점 더 꼬여가는 느낌이다.

정부는 올해 입시는 예정대로 가되 2026학년도 입시 유예를 포함해 모든 사안을 '여야의정 협의체'에서 대화로 풀자고 한다. 의사들은 철옹성이다. 당장 대통령이 사과하고 해당 부처 장·차관도 파면해야 한다고 기세등등하다. 물론 올해 증원도 백지화해야 한다고 강경한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심지어 입학정원을 더 줄여야 한다고 윽박지른다.

돌이켜보면 연초에 윤 대통령이 의대 입학정원 증원 문제를 들고 나왔을 때 국민 여론은 압도적 찬성이었다.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을 예로 들면서 지금 같이 의사가 부족해서는 앞으로 10년 후에는 의료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는 대통령의 설명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상당수 의대 교수들조차도 의사가 부족하다는 부분에는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두 방향에서 발생했다. 첫째, '2천명 증원'이라는 절대 바꿀 수 없는 숫자를 정부가 들고 나온 것이다. 둘째, 4월 10일 총선에서 집권여당 국민의힘이 참패한 것이다. 극도의 여소야대 정국이 펼쳐지면서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윤 대통령은 사실상 '레임덕'의 늪에 갇힌 것이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의사들이 이젠 거의 '몽니' 부리듯 정부를 몰아세우고 있다.

"의료인의 헌신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서". 이 말은 윤 대통령이 한시적 3.5배 진찰료 인상을 발표하면서 밝힌 논거다. 지난 반년 넘게 '집단 이기주의'를 앞세운 의사들의 '몽니'를 정면 돌파하겠다던 그 기세는 온데간데없다. '의사 불패' 신화가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이다. 대한의사협회는 "수능도 바로 전날 취소된 적 있다"며 지금 진행 중인 2025학년도 의대 입시(정원 4천567명)를 즉각 취소하지 않는 한 대화는 없다고 배짱이다.

약팽소선(若烹小鮮)이란 말이 있다. 국가를 경영할 때는 마치 작은 생선을 굽듯 너무 강하게 뒤척이면 안 된다는 말이다. 또 무신불립(無信不立)이란 말도 있다. 백성의 신뢰를 잃으면 결코 나라를 지탱할 수 없다는 말이다. 위정자들이 정말 가슴에 새기고 새겨야 할 경구다. 국정을 이끌어가면서 난폭운전, 갈팡질팡 운전은 금물이다. 호시우보(虎視牛步),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상황을 파악한 다음 무소의 뿔 마냥 뚜벅뚜벅 걸어야 한다.

의대 입학정원 증원 문제는 사실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1998년 의대 입학정원은 3천507명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의약분쟁 때 의사들의 파업과 반발로 2006년에 3천58명으로 줄어든 뒤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증원을 추진했으나 코로나19가 창궐한 상황에서 의사들의 저항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이게 현실이다.

의사 증원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다. 윤석열 정부는 이미 의사들에게 멱살을 잡힌 것이나 다름없다. 당초 그 의도는 좋았으나 문제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영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의사들에게 한 번 더 밀리면 국민의 신뢰마저 날아갈 판이다. 이래저래 걱정이 태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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