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 칼럼] ‘말 무덤’(言塚)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최두성 정치부장
최두성 정치부장

제22대 국회 개원식(2일)에 윤석열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현직 대통령의 불참은 처음이었다. 개원식 자체도 역대 가장 늦어, 이날 22대 국회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동시에 두 가지나 썼다.

지각 개원은 골 깊은 여야 간 갈등이 자초했다. 상대를 향한 '거친 말'이 타협, 양보를 막은 탓이다.

대통령실은 대통령의 불참을 '비정상 국회' 때문으로 돌렸다. 대통령 부부를 향해 "살인자"라고 한 전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발언을 설명 과정에서 언급했다. 전 의원은 지난달 14일 '검사(김영철) 탄핵소추 사건 조사 청문회'에서 국민권익위 간부의 사망과 김건희 여사 의혹 건을 연결하며 "김건희, 윤석열이 죽인 것이다. 살인자다"고 외쳤다.

개원식 두 가지 오명은 '나쁜 말'이 빚은 결과다.

국회의원들의 언사가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조롱과 모욕은 예사다. 눈을 가리고 듣는다면 '시정잡배'(市井雜輩·펀둥펀둥 놀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며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점잖지 못한 무리)의 '욕하기 대회' 같을 때도 있다.

말이 창이 돼 상대를 찌르지만, 이게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이나 임무는 아니다.

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 회의는 '꼬붕'과 '빌런' 공방 속에 파행됐다. 앞서 2일에는 '레닌' '또라이' 등 폭언이 오가다 국방부장관 청문회가 멈췄다. 지금 국회는 민주당이 들고나온 '계엄령 의혹'으로 옥신각신 중이다. 야유와 폭언이 국회 곳곳에서 그치질 않는다.

뱉은 말엔 사과가 없고, 들은 말엔 화를 내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오죽했으면 막말과 폭언, 허위 사실 유포 등을 제재하는 내용의 '국회의원 윤리 실천법' 제정 제안이 나왔을까.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5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이를 제안하며 "국민들에게 '국회의원들은 우리보다 많이 배우고 잘난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도 안 쓰는 막말을 마구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국민의 대표라니 창피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증오와 적대적 표현을 강력하게 제재하는 영미 의회나, 명예훼손이나 모욕적 발언은 면책특권 적용을 제외하는 독일 의회가 좋은 사례"라고 했다.

경북 예천의 한 마을엔 말 무덤, '언총'(言塚)이 있다. 임진왜란 무렵 갖가지 성씨를 지닌 마을 사람들이 자주 말다툼을 벌이자 몇몇 어른들이 과객의 도움을 받아 마을 입구에 '재갈바위'를 세우고, 싸움의 발단이 된 험한 말을 사발에 담아 땅에 묻도록 했더니 다툼질과 언쟁이 없어졌다고 한다. 국회에도 말 무덤이 필요해 보인다.

여야에는 의료대란, 연금 개혁, 김건희 여사 특검법, 채 상병 사건 수사 외압 의혹, 금융투자소득세 등 해결이 급한 과제가 수북이 놓여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 문재인 전 대통령 수사에다 '방송 4법'과 '노란봉투법' '전 국민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법' 등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 국회로 되돌아온 법안에 대한 재표결도 예정돼 있다. 다음 달 7일부터는 국정감사도 진행된다. 정부가 편성한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심사 역시 대기 중이다. 곳곳이 충돌 지점이다. 험하고 거칠고 나쁜 말들의 '박람회'로 전락할 요소는 많다.

이기주 작가는 저서 '말의 품격'에서 "당신의 입이 아닌 귀를 내어 주면서 상대의 마음을 얻으라"고 조언했다. 겉으로만 민생을 외쳤던 국회의원들이 새기고, 실천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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