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19>제사의 인문학

제사도 살아남기 힘든 세상…가족의 情만큼은 이어지길

2018년 서울 효장동 아름지기에서 거행된
2018년 서울 효장동 아름지기에서 거행된 ' 가가례 집집마다 다른 제례의 풍경'에서 선보인 안동 진성이씨 퇴계 이황 종가 불천위 제사상. 기름에 지진 전이 전혀 오르지 않는 게 특징이다. 모두 26가지 음식이 올라가 있다.

추석이 코밑으로 다가왔다. 만물이 오곡백과로 환치되는 순간. 한국판 추수감사절인 셈. 그래서 한민족은 고래로 하늘과 땅, 그리고 나를 존재케 했던 그 선조들의 노고에 대해 '빚 갚음'의 마음을 애써 표출해왔다. 홍익인간의 모토를 따라 우리는 하늘제사(祭天) 의식을 봉헌했다.

◆천제의식의 시원

사서삼경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주역'(周易). 하늘‧땅‧인간의 이치. 이 고차방정식을 푸는 게 여간 녹록지 않았다. 그중 하늘의 명(天命)은 난공불락의 메시지였다. 군주가 되려는 자는 이 대목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다소 고답적인 내용이 될지 모르겠지만 원구단(圓丘壇)에 얽힌 스토리를 조금 풀어볼까 한다. 조선초 왕들은 현재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 서울 자리에 있었던, 한때 '환단'(桓檀) 등으로 불렸던 '남단'(南壇)에서 천제를 올렸다. 그 흐름은 조선 중기부터 단절된다. 그걸 부활시킨 사람은 '황제' 칭호를 썼던 고종이었다. 원구단에서 천제를 부활한다. 그 공간은 대한제국 선포 장소이기도 했다.

하늘의 운행자인 '상제'(上帝)의 기운은 원구단, 땅의 기운은 '사직단', 그리고 조상의 영흠함은 '종묘'에 귀착됐다. 종묘와 사직이 합해진 '종묘사직'. 이게 조선 성리학자의 존재 기반이었다. 예의 저 3종세트는 천지인(天地人) 삼재사상(三才思想)의 모토. 'K-역사'의 대표적 아이콘이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흐름은 아직 포구에 갇혀 있다. 국제사학계로 진출하지 못한 형국이다.

한민족학회장, 고조선단군학회장 등을 거친 윤명철 교수의 '한국, 한국인-대륙과 바다에서 찾은 우리 역사'는 한민족 대기만성을 외친다. 소설가 김진명도 마찬가지. 그리고 또 한 사람. 지리산에 웅거하고 있는 한풀 선사는 하동군 천학동 지척에 '삼성궁'(三聖宮)을 오픈했다. 꼭 '한민족 버전의 디즈니랜드' 같았다. 한민족의 으뜸 모태격인 마고(麻姑)할매를 위한 마고성도 지었다. 탄생의 기운을 관장하는 삼신할매, 제주도 바다의 신기원이랄 수 있는 영등할매, 그리고 훗날 환인과 환웅, 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찬연한 '한민족 신기원'을 밝히려 했던 '환단고기'(桓檀古記)의 내용과도 중첩된다. 그 스토리의 일부분은 신라 눌지왕 때 대신인 박제상이 저술했다고 하는 역사서인 '징심록'(澄心錄)의 일부인 '부도지'(符都誌)에도 등장한다.

문제의 부침개. 성균관에서도 장만하기 부담스러워 하는 신세대를 겨냥, 힘들면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했다.
문제의 부침개. 성균관에서도 장만하기 부담스러워 하는 신세대를 겨냥, 힘들면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했다.

◆천덕꾸러기 제사

아무튼, 제사(祭祀). 그동안 한민족 최고의 문화아이콘이었다. 지금도 그럴까. 형식만 남고 본질은 '사망'해버린 것 같다.

얼마 전 성균관이 충격적 제안을 했다. 제사를 부담스러워하는 신세대 부부를 겨냥한 듯, '준비하기 어려우면 부침개 등은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평소 식사 준비하듯 정성을 갖고 제사상을 마련하면 된다'고 다독였다. 만감이 교차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독백을 했다.

'조선조 명문거유의 생리에는 제사가 딱이었겠지, 허나, 지금 세상은 너무도 많이 변해버렸다. 그 시절에는 가문을 위해 살았지만 이젠 개인의 출세에 목숨을 건다. 어느덧, 문중도 묘사도 친척관계도 바닥을 드러내는 것 같고, 그렇다면 제사도 그 고단했던 여정의 막바지에 다다른 것 같은데….'

◆가정의례준칙

가정의례준칙(1969년)에 의해 제사는 '간소화 모드'로 수정된다. 그건 '예고편'이었다. 이젠 디지털 모드로 부품을 전면 교체해야 될 시점인 것 같다. 그렇게 짱짱하던 '세거지 문중문화'는 핵가족 개인문화로 대체돼 버렸다. 가족의 운명은 직장의 명운에 달려 있다. 직장 때문에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종손이 외국에 살기도 한다. 제사를 없앤 기독교 집안도 적잖다. 묘사 시즌과 대학입시 시즌이 겹친다. 우리의 민법은 더 이상 상속에 있어 장남을 배려하지 않는다. 딸자식도 N분의 1 권리가 있다. 그렇게 짱짱하던 장남문화도 용도폐기된 형국이다.

그 시절 양반가에서는 '과거급제'로 입신양명하려 했다. 그게 종묘사직과 가문을 위한 일이었다. 문중의 백미는 단연 '4대 봉제사'. 이를 봉행하는 사당과 선영은 각 문중의 심장이었다. 종손은 '제생제사'(祭生祭死), 제사를 위해 태어났고 제사 지내다 죽었다. 조선 팔도가 제사란 집단최면에 걸린다.

종손과 종부는 제사와 동의어. 효행(孝行) 가문 경쟁은 치열했다. 그 효자들이 일제강점기부터 슬금슬금 문중을 등지며 사회와 국가 속으로 뛰어든다. 문중은 가족으로 강등되어갔다. 가장 자리도 어느덧 남성에서 여성으로 축이 이동되는 중이다.

추석날 입맛에 따라 송편 이외 다양한 떡을 많이 선택하기도 한다. 몇 년 전 찍어뒀던 남문시장 내 한 떡 가게 진열 중인 떡들이다.
추석날 입맛에 따라 송편 이외 다양한 떡을 많이 선택하기도 한다. 몇 년 전 찍어뒀던 남문시장 내 한 떡 가게 진열 중인 떡들이다.

◆가문보다 직장

'시집살이'란 말도 이젠 '사어'(死語)이다. 맞벌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자녀 교육은 학교·학원의 몫. 양가 어르신의 설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 조부모와의 유대는 절멸 상태. 대입과 취업이 제사보다 우선순위가 된 탓이다. 시험에 매몰된 아이한테는 친척조차 낯설다.

제사? 요즘 아이에게는 솔직히 UFO나 마찬가지다. 이 틈바구니를 파고 든 '괴물' 같은 최상위포식자가 있다. 바로 휴대폰과 반려동물이다. 부모와 친척의 정보다 눈 친구가 더 절실한 세상이다.

이제 그 누구도 '제사가 우선'이라고 단언하지 못한다. 일부 제사지상주의자들은 '제사는 천하의 대본(祭祀天下大本)'이라고 목소리를 돋운다. 안 지내면 조상이 자기 집안을 해코지할까 두려워 마지못해 지내기도 한다. 조상의 음덕 속에는 후손의 기복욕(器服欲)이 공존하는 것도 사실이다.

실직, 파산, 집안갈등 등으로 고개 숙인 자들에겐 제사가 자신의 아픔을 더 증폭시키는 것 같아 원망스럽기만 하다. 제사를 '걸림돌'이라 여기는 자가 너무도 많다.

이제부터 제사 대신 '가족'이라 말하자. 명절, 식구끼리 베이스캠프에서 그동안 안부를 확인하고 가족의 정을 중간점검하는 날이라 생각해도 좋다.

지금 댁의 제사는 무사한가. '가족식사' 이상의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제사라면? 수명을 다한 제사의 지난 세월을 위해 무슨 헌사를 던져야 할까? 명절날 문 닫은 식당도 많고 하니, 식구끼리 식사도 해야 하니, 그냥 '포트럭 패밀리 파티'하듯 평소 밥상처럼 진설하면 조상님이 진노하실까. 제사음식 전문업체에 맡기면 더 노여워하실까?

추석을 대표하는 음식은 송편. 송편은 흰 떡에 솔잎에서 발산되는 소나무의 정기를 불어넣은 떡이다. 송편은 쌀가루에 무엇을 첨가하느냐와 무엇을 소로 넣느냐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팥소를 넣는 게 가장 보편적인데 요즘은 별별 송편이 입맛을 사로잡는다.
추석을 대표하는 음식은 송편. 송편은 흰 떡에 솔잎에서 발산되는 소나무의 정기를 불어넣은 떡이다. 송편은 쌀가루에 무엇을 첨가하느냐와 무엇을 소로 넣느냐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팥소를 넣는 게 가장 보편적인데 요즘은 별별 송편이 입맛을 사로잡는다.

◆에필로그 추석

갑자기 '도적'이 생각난다. 다른 지역과 달리 안동을 포함 경상도 지역에서는 도적을 가장 주된 제물로 여긴다. 예서(禮書)에는 '편적(片炙)'이라고 하여 계적(닭)·육적(쇠고기)·어적(생선)의 3적을 각각 올리도록 되어 있다. 이들 3적을 모아서 적틀(炙臺)에 고임 형태로 높이 쌓는 것을 도적이라 한다.

도적의 높이는 무려 40㎝에 이르며 다른 제물과 달리 남성들이 직접 마련한다. 안동 지역 도적의 가장 큰 특징은 고임 형태를 잘 유지하기 위해 '관적(串炙)', 곧 꼬치를 이용한다는 사실이다. 꼬치는 사리나무 가지에 육류나 생선을 토막내어 꿰는 음식으로 나뭇가지가 버팀목 구실을 한다.

도적을 쌓을 때는 '우모린'(羽毛鱗)의 원칙에 근거하여 적틀의 가장 하단에 바다의 생선, 중단에는 육지의 짐승, 상단에 하늘의 새를 배치하는데, 이는 하늘·땅·바다로 구성된 우주적 질서를 상징한다. 이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은 우주에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아울러 도적에는 생육(生肉)을 쓰는 것이 원칙이다. 통마리 닭을 가볍게 삶은 뒤 토간장을 네 차례 발라 연거푸 조려낸다. 자연 속속들이 간이 배어들어 맛이 그만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 중인 모친이 그 음식을 참 잘 했었다.

소금을 뿌려 고배 스타일로 염장 중인 돔배기.
소금을 뿌려 고배 스타일로 염장 중인 돔배기.

도적만큼이나 없어서 안 되는 제수가 바로 문어숙회와 상어돔배기. 예전 경북 내륙권은 활어는커녕 선어도 신선한 걸 맛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제수로 구색을 갖춰야 하기에 염장한 3대 생선이 발탁되는 데 바로 '문어‧고등어‧상어'다. 이 셋은 공통적으로 비늘이 없다. 원래 비늘 없는 생선은 사용하지 않았는데 요놈들은 예외다. 상어와 고등어는 천일염으로 염장을 해서 상품화 한 것이고 숙회용 문어는 뜨거운 물에 한 번 데쳐 꽃처럼 피어나온 것이다.

문어는 참 재밌는 동물이다. 보통 선비들은 비늘 없는 생선은 제수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어는 예외다. 문의 한자는 글월 문(文)이다. 문어가 놀랐을 때 적에게 쏘아대는 검은 액체가 바로 선비들의 문방사우 중 하나인 먹을 갈아 만든 먹물과 흡사하다. 또한 영리하기 사람 못지 않아 모르긴 해도 사람 말를 잘 알아먹는 용궁의 사대부라 여겨 그놈을 제수로 발탁하게 된 모양이다. 문어는 동해안 묵호, 삼척 등지에서 잡혀 오지만 최대 판매처는 영주, 안동이다. 특히 영주와 안동의 두 시장은 '문어시장'으로 불린다. 원래 강원도 동해삼척권에서 잡은 문어는 한번 삶아 영동선을 통해 영주까지 이동되는데 그동안 숙성이 진행됐다.

살아남기 만만찮은 세상살이, 혈족의 상처를 잘 어루만져 주면서 추석 명절 잘 보내시길 앙망하는 바이다.

명절, 잔치 등을 겨냥한 다양한 혼례용 이바지음식 및 온갖 떡류를 파는 염매시장 근처 종로 떡전가게 전경.
명절, 잔치 등을 겨냥한 다양한 혼례용 이바지음식 및 온갖 떡류를 파는 염매시장 근처 종로 떡전가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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