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정상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의 기록

[책] 순응주의자
알베르토 모라비아 지음/정란기 번역/문학과 지성사 펴냄

순응주의자 책 표지
순응주의자 책 표지

2008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열렸다. 감독들의 추천작을 골라 상영하는 영화제로 그해 박찬욱 감독이 선택한 작품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순응자'였다. 아메리칸 뉴시네마 감독들이 추앙하는 작품이면서 코엔 형제가 새 영화 크랭크인 전에 스태프들과 함께 보는 걸로 유명하다. 역사를 이용해 영화적 열망을 펼치려는 베르톨루치의 연출도 좋았지만, 빛의 마술사 비토리오 스토라로가 맡은 촬영은 가히 명불허전이었다. '순응자'의 원작은 1951년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소설 '순응주의자'다.

'순응주의자'는 마르첼로의 유년기부터 최후까지의 기록 즉 비정상적 기질을 정상화하기 위한 삶의 투쟁을 그린다. 작가는 마르첼로의 유년기를 폭력과 살인으로 채색한다. 어린 마르첼로는 골풀로 꽃을 자르고 도마뱀을 죽이더니 새총으로 고양이를 해치고 마침내 권총으로 리노를 쏜다. 모라비아는 비정상적 기질의 근원을 묘사하는데, 욕망에 따라 불륜을 저지르는 어머니와 폭력적이고 심한 의처증으로 정신병원에 갇힌 아버지와 죄의식에 사로잡힌 아들을 교정하지 못하는 가정환경과 권총을 욕망케 만든 동급생의 괴롭힘까지. 마르첼로가 신념 강한 파시스트로 진입할 명분을 차곡차곡 쌓아올린다. 비정상적인 가정과 공감 받지 못한 파괴 욕구와 우발적 살인으로 점철된 유년기는 마르첼로가 파시즘과 결탁·복종하며 반파시스트 암살에 순응하는 충분한 당위가 된다.

사적 폭력성 분출과 정상이 되기 위한 체제 순응은 정상적 남자로 인정받는 관습적 순응인 결혼으로 이어진다. "잠시 후 그녀는 내 아내가 될 거야. 이것이 정상이 되는 출발점이야."(209쪽). 보통남자가 되고 싶어 결혼한 그의 아내 줄리아 역시 정상적 여성 삶에 안착하려는 욕구로 마르첼로를 선택한 셈이었다.

"이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 정상성이라는 신기루를 위한 것이었다."(438쪽)

소설의 결말은 마르첼로의 슬픈 최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러니까 그가 믿고 따른 파시즘 정권은 몰락했고 자신의 원죄를 극복하려 개입한 콰드리 부부 암살이 불필요했음을 뒤늦게 알게 된 후였다. 무솔리니 실각 이후 국왕 앞에서 흔들리는 유약한 시민에게 회의를 느낀 후였고, 정상인의 삶을 위해 평생을 바친 최초의 치부, 살인이 미수였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였다. 이처럼 작가는 혼란한 세계 사이에 선 인물들을 앞세워 정상과 비정상의 허상을 제시한다. "이미 원죄로 얼룩진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려 하는 숨가쁘고 헛된 열망이 정상이었다."(431쪽)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평론가 백정우

모라비아는 '비정상에서 벗어나고,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정상성을 찾고자 열망한' 마르첼로의 분투를 통해 묻는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무엇인지를. 정상을 확보하기 위해 파시즘이라는 비정상에 복무했던 마르첼로와 그것을 비정상으로 바라본 콰드리 교수 중 누가 정상이었을까. 명확하게 구분 짓고 단정할 근거를 누가 제시할 수 있을까.

영화를 만든 베르톨루치는 '순응자'로 자신의 정신적 아버지 고다르와 결별한다. 마르첼로가 콰드리의 죽음을 원했듯이 베르톨루치 역시 "나는 내 선생이던 고다르를 죽이길 원한다"고 말했다. 풍속과 올바른 시대정신 사이를 횡단하며 거대한 모순의 기념비를 세운 베르톨루치 역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진 못했을 터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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