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1월 충남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과 조선관군·일본군 연합군이 격돌했다. 동학혁명의 향방을 가른 우금치전투(牛金峙戰鬪)다. 병력 수(數)에서는 동학농민군이 압도적이었으나 화력(火力)에서는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일본군 개인 화기는 무라다(村田) 소총이었고, 동학농민군 개인 화기는 주로 화승총과 죽창, 창이었다.
무라다 소총은 서양인 체구에 맞게 제작된 영국제 스나이더(Snider) 소총을 일본인 체구에 맞게 개조한 것이다. 무엇인가를 개조(改造)·개선(改善)했다는 사실에는 여러 의미가 포함돼 있다. 우선 서양인 체구에 맞게 제작된 스나이더 소총과 일본인 체구 사이의 '부조화(不調和)'를 있는 그대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부조화, 불편(不便), 불리(不利)를 극복하려는 진취적 태도가 있고, 개선을 위해 현실적이고 지적인 노력을 부단히 했음을 의미한다.
동학군의 화승총은 전장식(前裝式: 일어서서 총구에 탄약을 재어 넣는 방식으로 장전)으로 2분에 1발 정도를 장전해 쏠 수 있었다. 일본군의 무라다 소총은 후장식(後裝式: 총신 뒷부분에 있는 폐쇄기를 열어 탄약을 장전하는 방식)으로 1분 동안 15발을 장전해 쏠 수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화력 격차를 극복할 대책을 고민하는 대신 '믿음의 세계'로 도피했다. 궁을(弓乙)이라는 부적(符籍)을 몸에 붙이거나 태워 재를 먹으면 총알이 피해 간다는 설(說)을 진중(陣中)에 퍼뜨린 것이다. 결과는 자명했다. 동학군은 총알이 빗발치는 적진을 향해 떼 지어 돌진했고, 사실상 '학살(虐殺)'됐다. 한쪽은 '실체'를 바꾸었고(체구에 맞게 총을 개선했고), 다른 한쪽은 실체가 아닌 '인식'을 바꾼 결과였다.(다른 이유도 많았지만)
일제시대 우리 국적(國籍)은 일본이 아니라 대한제국(조선)이었다는 생각은 한국인의 '소망적 믿음'일 뿐이다. 국가 지도층(국회의원)이 국민을 허황한 믿음의 세계로 끌고 가는 것은 국민과 조국에 대한 배신이다. 대한제국이 망하고 없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하면 망한 원인을 성찰할 수 없다. 침략한 일본이 나쁘지, 당한 조선(대한제국)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한, 외세(外勢)의 선의(善意)를 기대하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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