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거대한 뿌리, 구미]<6>신라시대 불교가 처음 전래된 곳, 신라불교초전지

"불도가 열리다" 신라 삼국통일의 시작점
구미시청 북쪽에 도개마을…불교 전래 '道開' 한자 사용
'井'자 모양 우물 '모례가정'…불심 가득한 샘물 계속 솟아

경북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에 있는 신라때 창건된 죽장사의 죽장사 5층석탑.1968년 국보로 지정됐다.
경북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에 있는 신라때 창건된 죽장사의 죽장사 5층석탑.1968년 국보로 지정됐다.

죽장사(竹仗寺)를 찾아 나선 것은 국보로 지정된 신라시대 5층 석탑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절로 가는 길은 호젓하다 못해 인적이 없었다. 석탑 외 대웅전조차 사라진 폐사지였으니 수백여 년 동안 아무도 찾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에 불교를 전래, 국교로 공인시키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로 대중불교를 완성시킨 아도화상과 이차돈, 원효대사를 기억하면서 그 절을 찾아 나섰다. 다행스럽게도 웅장한 석탑 뒤로 (새로 지은)대웅전이 보여 안도했다.

◆불국정토의 나라,신라

무한전쟁의 시대였다. 고구려·백제·신라는 각기 상호동맹을 맺었지만 뺏고 뺏기는 영토전쟁을 불사했다.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시도하자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했고 전열을 가다듬은 신라가 삼국통일에 나서자 고구려와 백제는 동맹으로 대응했다. 고구려·백제·신라 순으로 순차적으로 불교가 전래됐지만 불교를 기반으로 '삼국통일'에 성공한 것은 신라였다.

신라는 스스로 부처의 땅 '불국정토(佛國淨土)'라 여겼다. 경주 '남산'은 부처가 사는 신들의 땅이었다. 그래서 남산에는 수백 여 곳의 사찰이 들어섰고 신라의 왕들은 아예 현세의 부처를 자처했다. 선덕·진덕·현덕·성덕 등은 모두 불가(佛家) 법명을 차용한 왕이었다.

삼국(三國) 중 가장 늦게 불교를 수용한 신라는 불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왕권을 강화했고,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만들어 오늘로 이어지는 정신문화의 바탕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깊다. 신라에 이은 고려 역시 불교국가였지만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고 고려후기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신진사대부가 등장, 새로운 세력을 형성했다.

신라시대 불교가 처음 전래된 곳으로 구미시 도개에 있는
신라시대 불교가 처음 전래된 곳으로 구미시 도개에 있는 '신라불교초전지'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곳

신라불교의 전래와 수용을 기억하고 있는 '신라불교초전지'는 간과할 수 없는 대단히 중요한 사적이 아닐 수 없다.구미시청에서 북쪽으로 25km 정도 올라가면 '도개'(道開)에 이른다. 도개는 한자 그대로 '불도(佛道)가 열리다(開)'는 의미를 지닌 마을이다. 신라시대 불교가 처음 전래된 곳이라는 의미다.

불교가 신라에 들어오기 전 신라인의 종교는 토속신앙이었다. 조상신을 믿거나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삼산오악과 같은 명산대천과 천지신명을 섬겼다. 신라 왕실은 성골과 진골 등 골품귀족들의 왕권견제에 대응하기위해 불교를 도입했다. 6세기 초까지도 제대로 왕권을 확립하지 못한 신라는 귀족들의 반대로 불교를 국교로 수용하지 못하다가 527년(법흥왕14)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국교로 공인하는 데 성공한다.

아도화상의 불교 전래 및 이차돈의 순교, 대중불교로 이끈 원효대사 등이 융합시킨 신라불교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성시킨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이 곳 도개에는 '모례가정'(毛禮家井 모례네 우물)이라는 오래된 우물이 있다. 우물井자 모양의 덮개가 덮여 있지만 모례가정에서는 불심(佛心)가득한 샘물이 여전히 솟아나고 있다. 이 우물이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파한 아도화상이 머물던 모례의 집이었다.

이곳 신라불교초전지에는 아도화상을 기리는 '신라불교초전 기념관'과 성불관 자비관 대각관 견성관 득도관, 사찰음식체험관 등의 불교체험시설이 오붓하게 자리 잡고 있다. 초전지 한 가운데에는 주물로 만든 아도화상 입상이 온화한 미소를 띤 채 방문객들을 맞아준다.

아도화상
아도화상

◆아도화상이 불교 전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아도화상의 신라불교 전래과정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법흥왕 15년(528)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일찍이 눌지왕(417~458)때 승려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 )에 왔는데 그 고을 사람인 모례(毛禮)가 자기 집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모셨다.

비처왕(毗處, 소지마립간 479~500) 대에 이르러 아도 화상이 시중드는 세 사람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다. 그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고 몇 년을 그곳에서 살다가 병도 없이 죽었다. 시중을 들던 세 사람은 계속 머물러 살면서 경전과 율(律)을 강독하니, 불법을 믿는 이가 종종 있었다.(삼국사기 권제4 신라본기 제4, 법흥왕)

도개에는
도개에는 '모례가정'(毛禮家井 모례네 우물)이라는 오래된 우물이 있다.이 우물이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파한 아도화상이 머물던 모례의 집이다.

'아도 또는 아두' 라고도 한다. 신라본기 제 4권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제19대 눌지왕 때 승려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에 이르렀다. 그 고을 사람 모례(혹은 모록(毛錄))가 집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고 그가 편안히 지내도록 하였다.(중략)

아도(阿道)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인데 정시(正始) 연간(240~248)에 조위(曹魏)의 아굴마(我堀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그녀와 정을 통하고 돌아갔다. 이 일로 인해 임신을 하였다. 아도가 태어나 5세가 되자 어머니가 아도를 출가시켰다. 16세에 위나라로 가서 아버지 굴마를 찾아뵈었고 현창화상 문하에서 공부하였다(중략)

생각해보건대 불교가 동쪽으로 전래된 형세는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에서 시작되어 신라에서 끝났을 것이다. (삼국유사 권제3, 흥법 제3, 아도가 신라에 불교의 터전을 마련하다.)

그렇다면 고구려 승려 아도는 어떻게 다른 곳도 아닌 선산에서 불교전래에 나섰을까?신라 내물왕 때 고구려는 군사를 보내 왜구를 물리치는데 도움을 줬다. 5세기 초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향을 피워 공주의 병을 치유했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불교초전지에 있는 아도화상 입상
신라불교초전지에 있는 아도화상 입상

◆이차돈의 순교, 불교를 국교로

아도화상이 불교를 전파한 도개는 고구려에서 문경새재를 넘어 왕경(王京)인 경주로 가는 길목이었다. 신라 왕경은 당시 귀족들의 토착신앙이 강했던 탓에 아도화상은 왕경까지 가지 못하고 변방에서 포교에 나섰을 것이다.

아도(我道),아두(阿頭),묵호자(墨胡子) 등으로 기록된 최초의 불교 전래자는 모두 같은 인물이기도 하고 승려자체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 신라인들은 '승'(僧) 이라는 명칭을 몰라 아두삼마(阿頭彡麽 삭발한 스님)라고 했다.

신라의 불교수용은 삼국통일의 동력이 됐고 우리 문화를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다.불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버티는 골품귀족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한 법흥왕은 '왕을 현세의 부처로 여기는 불국정토'개념을 도입했다. 불교는 신라의 지배이데올로기였다. 불교가 신라의 국교가 된 것은 이차돈의 순교였다.

이광수의 소설 '이차돈의 사'에 묘사된 이차돈은 '신라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연인 달님과 결혼을 약속하지만 이를 질투하는 공주와 법흥왕의 자리를 노리는 귀족들의 모략으로 고구려로 쫓겨난다. 고구려의 발전에 고무된 이차돈은 불교교리를 배워서 돌아왔으나 귀족들이 불교를 반대하자 순교를 자처했다.'

삼국유사는 527년 22세의 이차돈이 "저의 목을 베어 왕의 위엄을 살리면 신하들도 더 이상 반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법흥왕에게 간언하자 이를 받아들여 이차돈을 왕명을 거스른 죄로 목을 베었다. 그러자 그 목에서 흰색 피가 한 길이나 솟구쳐 올라 하얀 꽃비가 내리고 땅이 요동치는 등의 이적(異蹟)이 일어났다고 기록했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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