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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원의 기록여행] 극장표 강매의 이유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9년 9월 17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9년 9월 17일 자

'요즘 각종 단체에서 극장예매가 성행하여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는 일반 민중의 생계를 한층 더 도탄의 구렁이로 몰아넣는가 하면 예매가 아니라 강매로 인해 일반시민의 여론을 자아내고 있는 사실이 비일비재하여 대구경찰서에서는 지난 14일 시내 극장업자들을 소집하여 방청권에 의한 입장을 사절케 하고 앞으로 방청권예매를 여하한 단체에도 엄금하게 되었다 하는데 금후 이와 같은 불미한 사실이 적발되면 소정 법규에 의해 엄중처단 할 것이라 한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9년 9월 17일 자)

1949년 추석을 보름여 앞둔 시점에 극장의 공연 티켓 예매를 둘러싸고 말썽이 났다. 해방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단체 중에 일부가 시민들에게 영화나 악극‧가극 등의 공연 입장권을 팔면서 불거진 문제였다. 말이 예매지 회유와 압박을 동원해 강제로 떠맡겼다. 가뜩이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시민들은 불만을 쏟아냈다. 경찰은 티켓을 강매하는 단체는 엄중 처벌 하겠다며 단속에 나섰다. 극장업자들에게는 방청권 입장을 사절토록 요청했다.

이들 단체가 공연 티켓을 강매한 이유는 뭐였을까. 이윤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입장권 판매는 관람 환경을 뒷걸음치게 했다. 강매 방청권은 공연장의 정원외 판매로 추정됐다. 이렇다 보니 돈을 내고도 관객은 대접받지 못하는 찬밥 신세가 되었다. 공연장 입장료가 인상돼도 마찬가지였다. 1947년 12월에는 영화 35원, 연극‧가극 65원, 오페라와 심포니는 1백 원으로 영화와 연극‧가극 등의 입장료를 인상했다. 당국은 업주들이 정원을 초과해 관객을 입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극장의 입장 정원은 어느 정도였을까. 만경관과 대구극장이 1천100명, 자유극장 900명, 송죽극장 840명, 키네마구락부는 200명이었다. 입장료 인상 조건으로 정원준수를 요구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돈벌이를 위해 정원을 초과하는 일은 흔했다. 1947년 연말에 올랐던 공연 요금은 4달 만에 다시 인상됐다. 영화의 일류신작은 70원, 연극은 120원, 오페라 심포니는 140원으로 인상됐다. 그렇다고 극장의 관람 환경이 개선되지도 않았다. 극장 안은 담배 연기로 자욱하고 심지어 소변을 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남선경제신문 1948년 11월 21일 자
남선경제신문 1948년 11월 21일 자

'대구공회당은 요즘 점차 삼류악극단 혹은 저속한 영화 등이 독점 상영되고 있어 공회당인지 오락 장소인지를 분간키 어려워 일반의 비난이 자자하고 있다. 이로 인해 요즘 대홀은 문자 그대로 가래침 휴지 조각으로 충만하고 있으며 출입국에 코딱지처럼 붙은 선전광고지와 변소는 파손으로 인해 마음 있는 부민들로 하여금 눈을 찌푸리게 해서 도저히 시민의 공회당의 얼굴은 찾을 길이 없는 형편이다.' (남선경제신문 1948년 11월 21일 자)

공연장의 관리부실은 대구부가 운영하는 대구공회당으로 불똥이 튀었다. 대구공회당은 일제 강점기인 1931년 완공됐다. 지하층을 포함해 4층 건물로 3층 대집회실은 2천 명, 2층은 소집회실 180명과 150명을 수용하는 식당이 들어섰다. 애초 공회당은 대중 집회나 회의실로 사용할 목적이었다. 대구부는 완공 직후 숙박시설을 추가하려고 했다. 일본 왕실 관계자 등이 대구를 방문하면 숙박시킬 요량이었다. 하지만 여관업자들의 반발이 거세 이태가 지난 1933년 9월에야 호텔시설 공사를 했다.

대구공회당은 해방 후에도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특설 링에서 권투 시합이 벌어졌고 홍길동전이나 사대연극부 등의 공연이 펼쳐졌다. 악극단 공연과 영화도 상영되었다. 하지만 삼류악극단이나 오락 위주의 영화 상영에는 비판이 뒤따랐다. 또 허술한 시설관리로 여론의 몰매를 맞기도 했다. 홀은 가래침과 휴지 등이 널브러져 있을 정도로 지저분하기 일쑤였다. 밤에는 노숙인들이 몰려들어 몸을 의탁했다. 공회당 측은 빠듯한 운영비 핑계를 댔다.

해방 후 이런저런 단체가 극장표 강매로 돈벌이하던 시절이 있었다. 대구부민 1만 명이 매일 극장을 찾을 정도로 관객 열기가 뜨거웠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부민들은 극장에서 잠시나마 민생고를 잊었다. 무더위가 이어졌던 이번 추석 연휴에 영화관은 활기를 띠었다. 이제나저제나 일상의 고달픔을 위안받으려는 사람이 줄지 않은 때문일까.

박창원
박창원

박창원(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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