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해에 가짜 독립운동가 김 알렉산드라의 일대기를 소개하는 칼럼을 쓴 바 있다. 그런데 김 알렉산드라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훈장 수훈자 중에 가짜 독립운동가가 우글거리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인들이 '남로당 수괴(首魁)'로 기억하는 박헌영의 첫 부인 주세죽이 그 전형에 해당할 것이다.
주세죽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국가보훈부의 공훈전자사료관 자료에 의하면 주세죽이 건국훈장을 받은 타당한 이유는 1919년 3·1 운동 당시 함흥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1개월간 함흥경찰서에 수감된 사실 정도다. 이후 주세죽의 행보는 독립운동이나 건국 활동과는 전혀 관련 없는 활동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주세죽은 함경남도 함흥의 개신교 계통 영생 여학교 2학년 재학 중 3·1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당한다. 이후 1921년 중국 상해 안정씨(晏鼎氏) 여학교에 유학하여 영어와 피아노를 배웠다. 이 무렵 주세죽은 피아니스트를 자처하며 공산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와 비슷해지려고 노력했다.
◆박헌영과 붉은 연애, 공산주의 방식 결혼
상해에서 허정숙의 소개로 박헌영을 만나게 된다. 주세죽은 마르크스 걸, 레닌 레이디를 자처한 공산주의 신여성이요, 박헌영은 1921년 5월 상해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여 공산당 열성 조직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른바 '붉은 연애'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날렸고, 결혼식도 여운형의 주례로 '공산주의 방식'으로 치렀다.
여운형은 "두 사람은 부부가 되어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조국 독립과 무산자 계급 해방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까?"라는 주례사를 낭독했다. 그들은 『자본론』 독일어판에 손을 얹고 혼인 서약을 했고, 하객들은 웨딩마치 대신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1922년 1월 하순 박헌영은 코민테른이 개최한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후 상해로 돌아왔다. 그 직후 코민테른으로부터 "국내에 잠입하여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지령을 받고 주세죽과 함께 국내 잠입한다. 서울에서 그는 조선일보·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비밀리에 공산주의 활동을 계속했다.
1925년 4월 17일, 박헌영은 김재봉·김약수 등과 서울 을지로 중국 음식점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다음날인 4월 18일 박헌영 집에서 조선공산당 외곽 단체로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책임 비서에 박헌영이 선임되었다.
박헌영과 함께 귀국한 주세죽은 조선여성동우회, 고려공산청년회 중앙 후보위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여성동우회는 1925년 결성된 한국 사회주의·공산주의·아나키스트 여성들이 조직한 단체다. 고려공산청년회는 1925년 4월 박헌영의 집에서 김단야·조봉암 등이 비밀 조직한 공산주의 청년동맹 조직이다. 한 마디로, 주세죽의 활동은 독립운동이 아니라 사회주의·공산주의·아나키즘 활동이었다. 국가보훈부의 공훈전자사료관 자료에 의하면 일제 경찰은 주세죽을 '여자 사회주의자 중 가장 맹렬한 자'로 평가하며 '요시찰인물'로 감시했다고 한다.
1925년 11월, 고려공산청년회 대표 박헌영이 상해의 여운형, 모스크바의 조봉암에게 보내려던 비밀보고서가 드러나 검거 선풍이 불었다. 박헌영과 주세죽도 체포되어 박헌영은 실형, 주세죽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박헌영은 정신이상자 행세를 하여 1927년 11월 22일 병보석으로 석방, 부인 주세죽과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한다. 모스크바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 주세죽은 딸 박 비비안나를 출산했다.
모스크바에는 박헌영의 이념적 동지 김단야가 망명하여 코민테른 극동아시아부 조선담당 조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박헌영은 김단야의 추천으로 1929년 1월 국제 레닌대학교에 입학했고, 주세죽은 동방근로자대학(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입학하여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다.
1929년 2월 박헌영은 소련공산당에 입당했고, 국제 레닌대학 졸업 후 동방근로자대학 2년 과정을 수학했다. 이후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런 교육을 통해 박헌영·주세죽 부부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완벽한 공산주의자로 재탄생했다.
1931년 3월 3월 코민테른은 박헌영 부부에게 "상해로 가 조선공산당을 지도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주세죽은 4살 된 딸 박 비비안나를 육아원에 맡기고 남편 박헌영과 함께 상해로 간다. 박 비비안나는 자신이 고아인 줄 알고 자라 소련 민속 무용가가 되었다.
◆남편 친구 김단야와 결혼
박헌영과 주세죽은 상해에서 지하 공산주의 조직을 결성, 국내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했다. 이 와중에 박헌영은 1933년 7월 5일, 상해 부두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징역 6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박헌영이 체포되자 주세죽은 남편 친구 김단야와 모스크바로 도주한다. 소련에서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주세죽은 김단야와 결혼한다. 김단야는 고향에 본처가 있었고, 둘째 부인이 공산주의 운동가 고명자였다. 두 명의 부인을 팽개치고 주세죽과 세 번째 결혼을 한 것이다. 주세죽은 김단야의 아들 김 비탈리를 낳았으나 석 달 만에 죽었다.
김단야와 주세죽의 결혼 생활은 1937년 스탈린이 벌인 광란의 숙청극 때 비극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김단야는 일본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이런 삶을 살았던 김단야에게 노무현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갖다 바쳤다. 주세죽은 사회적 위험 분자, 일본 밀정 혐의로 의심받아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되어 강제노동형에 처해졌다.
박헌영은 1939년 9월 가석방으로 대전교도소에서 출소했다. 그는 지하에서 경성콤그룹을 지도하며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충북 영동군의 포수 집안에서 태어난 20세 연하의 처녀 정순년과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승려 원경(속명 박병삼, 평택 무봉산 만기사 주지)이다. 원경 승려는 1987년 박원순 변호사, 임헌영(문학평론가), 서중석 등과 함께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 한국 사회에 좌파 역사관 전파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카자흐스탄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주세죽은 해방 후 월북한 박헌영이 북한 요직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스탈린에게 "남편이 있는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여러 차례 탄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박헌영은 자신을 배신한 주세죽의 구원의 손길을 외면하고 윤레나라는 23세 연하의 여비서와 1949년 재혼했다.
주세죽은 1953년 소련에서 사망했다. 2007년 노무현 정부의 국가보훈처는 주세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대체 주세죽의 활동이 대한민국 건국과 무슨 연관이 있기에 건국훈장을 수여한 것일까? 이 나라는 '빨갱이 짓'을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 그 후손들에게 국가 세금으로 연금을 갖다 바치는 일을 언제까지 반복하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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