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폭염이 끝나자 가을 장마가 계속되고 있다. 무더위를 식히고 가을을 불러오는 비가 폭우로 변해 적잖은 피해를 낳고 있다는 뉴스를 본다. 자연의 분노 앞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환경을 훼손해 온 과오를 반성하지 못하고 다른 이유와 변명거리들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일상과 산업, 제도 등 현실에서의 방향 전환뿐만 아니라 패러다임의 획기적인 변화와 실천이 필요한 시점이다.
순수 음악과 대중음악을 막론하고 비를 주제로 하는 곡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인상주의 작곡가 드뷔시(1862~1918)의 음악에는 비나 물과 관련된 곡들이 적지 않다. 교향시 '바다'(바다의 새벽부터 낮까지, 파도의 유희, 바람과 바다의 대화) '영상 1'(물의 반영, 라모 찬가, 운동), '영상 2'(잎사귀를 스쳐가는 종소리, 달은 황폐한 절 위에 걸려 있다, 금붕어), 판화 등….
'판화(Estampes, 1903)'는 탑, 그라나다의 저녁, 비 내리는 정원의 3곡으로 구성돼 있다. 말 그대로 원화가 아닌 판화를 들려준다. 물에 비쳐 아롱지는 탑의 모습과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의 정경, 비가 바꿔놓은 정원의 모습을 회화적 기법으로 표현한다. 투명한 막과 같은 음악적 과정이 개입되어 원화를 판화로 바꿔놓는다. 이 3개의 곡은 모두 정지 상태가 아닌 불확실한 동요의 상태를 드러낸다. 동양적인 5음 음계, 불협화음, 이국적인 감성으로 피아노 고유의 음향적 감각과 음색 효과의 아름다움에 치중한다. 드뷔시는 인상주의 미술과 마찬가지로 대상을 있는 대로 묘사하지 않고 대상에서 받은 심정적 분위기와 정서의 울림을 표현한다. 형식이나 논리적 일관성, 명확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묘사와 서술의 방식보다는 감각적이고 상징적이며 암시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아주 오래전 상트페테르부르크음악원 서머스쿨에서 피아노 레슨을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마침 레슨 곡이 드뷔시의 '판화'였다. 교수는 이 곡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직접 연주를 되풀이해 보여줬다. 동양의 신비로운 탑이 물 위에 비친 몽환적인 모습을 어떻게 피아노의 음색으로 구현해야 할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프레이즈와 건반과 페달을 다뤄야 하는 지를 상세히 알려줬다.
연주는 재현의 예술이다. 재현은 오선 위에 박제돼 있는 음표들에 숨을 불어넣어 생기 넘치는 음악으로 살려내는 작업이다. 이것은 시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작곡가가 원하는 바에 근접하는 정확도 높은 연주를 할 수 있고 행간에 숨어 있는 의도들을 발견해 시의 묘미를 읽어낼 수 있다.
'판화' 중 비 내리는 정원은 후두둑 쏟아지다가 점차 큰 비로 변하는 여름 소나기를 떠올리게 한다. 유리창 너머 정원의 꽃과 나무, 이파리 위로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을 보고 있는 듯하다. 드뷔시의 악보 또한 매우 시각적이다. 오선 위로 음표들이 빗방울처럼 검은 열매처럼 쏟아져 내린다. 며칠째 계속되는 비로 삽목해 둔 목수국과 장미가 잎을 틔우고 봉오리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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