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환자 유진이는 시설아동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설아동이라기보다는 시설에서 자랐고 지금은 독립해서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유진이는 장애가 없는 쌍둥이 오빠와 달리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고, 기억도 안나는 갓난장이 아기때 시설에 맡겨졌다고 했다. 내가 유진이를 처음 본 건 3살인가 4살 때였다. 혼자 앉지도 못해 기어다니던 유진이는 또래에 비해 작고 걷지도 못하지만 입으로는 참견할 거 다하고 투정부릴 거 다 부리는, 눈이 반짝이는 아이였다. 당시 나한테 진료보던 시설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지라 특별할 거 없던 유진이와의 관계가 달라진 건 편지때문이었다. 시설 선생님이, 유진이는 한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도통 공부를 안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한글 공부를 시킬 겸 진료올 때마다 내게 한 줄이라도 편지를 써오라고 했다.
25년전 받은 첫 편지는, "안녕하세요"였던 것 같다. 그야말로 딱 한줄이었다. 하지만 두 달마다 돌아오는 진료때 받는 유진이의 편지는 "안녕하세요, 선생님"에서 "안녕하세요, 선생님 강유진입니다"로 점점 길어졌고 어느새 한 장을 가득 채우고 두 장 세 장일 때도 있었다.
손에 힘이 없어 삐뚤빼뚤하고 맞춤법도 많이 틀리지만 무슨 말인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꾹꾹 눌러가며 족히 30분은 썼을 것 같은 유진이의 편지를 나는 25년째 받고 있다. 이젠 그만 써와도 된다고 해도 유진이는 하루에 한 장씩 쓰는 편지가 즐겁다고 했다.
혼자 지내는 유진이가 염려스러워 50살쯤 되면 다시 시설로 들어가는 건 어떻냐는 나의 제안에 본인은 절대 싫단다. 걷지도 못하고 행동도 빠르지 않은데 혼자 있다가 사고를 당하면 어쩌냐니까, "그래도 태어나서 다른 사람들처럼 나혼자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한번 살아보고 싶어요"란다. 여전히 불안한 나의 눈빛에 워치가 어쩌고 호신봉이 어쩌고 하며 걱정말란다.
어느 날 내가 물었다. 장애없이 태어났다면 제일 하고 싶은 게 뭐냐고. 유진이의 대답은 의외였다. "직장을 가지고 내 힘으로 돈을 벌어보고 싶어요"
장애가 심하고 기초수급자인데다 아버지가 남겨준 연금이 있어 아주 넉넉하진 않아도 먹고 살 걱정없는 유진이인데 스스로 일을 해서 돈을 벌어보고 싶단다. 오늘 아침 일어나기 싫어 미적거리다 겨우 지각을 면한 내가 머쓱해졌다.
유진이는 나에겐 당연한 일상이 본인이 꿈꾸는 행복이라고 했다. 취직을 하고, 늦잠자고 싶은 아침에 억지로 일어나 출근을 하고, 턱이 있는지 없는지 신경쓰지 않고 카페에 뛰어가 커피 한잔을 사고, 직장 상사의 꾸지람을 들으며 동료들과 같이 점심을 먹는, 그리고 휴가때 어디로 놀러갈 지 고민하는 평범한 행복. 나의 행복안에서는 당연한 것들이 유진이의 행복안에서는 꿈꾸는 것만 가능하다는 것이 내 말문을 막히게 했다. 하지만 유진이를 다시 만나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유진아! 니 말이 맞아, 니가 꿈꾸는 대로 살 수 없을 지도 모르지만, 니가 원하는 대로 살 용기는 절대 잃지 마! 응원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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