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호시절엔 그 좋음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참 지난 뒤에라도 '뒤돌아보는' 눈이 열린다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이다.
한때의 참된 의미는 항상 뒷북치듯 느지막이 제 모습(본래면목)을 드러낸다. 그래서 "곧바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는 하나같이 굽어 있다"는 니체의 말에 수긍이 간다. 모든 일들이 결국 될 대로 되나, '때'를 기다려야 한다. 등이 굽을 대로 굽어야 바닥에 밟히던 옥돌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사물과 사람은 한계를 겪을 때 제 빛깔과 속살을 드러낸다. 갈 데/때까지 가 봐야 그 내용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정확한 곳과 때가 어디인지는 정해진 게 없다. 인간의 지성으로 잘 판단, 행위 해야 한다. 이 경우 선한 내적 동기가 중요할까. 아니면 최대 다수가 지지하는 외적인 결과가 중요할까. 다수결, 포퓰리즘을 따르는 우리 사회에서는 후자 쪽이 더 지지받곤 한다.
임계점이란 것이 있다. 어떤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지점[幾, 機]을 말한다. 예컨대 물이 액체와 기체로 구분되는 최대 온도와 압력의 한계 같은 것이다. '십년공부'니 '막다른 골목'이니 '벼랑 끝'이니 하는 말들이 일상에서 접하는 임계점의 다른 표현이다. 보통 정해진 기간이나 노력을 '할 만큼 다 한' 뒤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달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한 다음, '될 대로 되는 흐름'에 그냥 맡겨두라는 '진인사대천명'이란 말은 사실 벼랑 끝에서 건네는 위로의 레토릭이자 지혜의 조언이다. '십년공부'의 공든 탑이 무너져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마는 헛수고가 부지기수 아닌가. 임계점을 생각할 경우 불교의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화두가 떠오른다. 백척이라는 높은 장대 위에 올라선 상태에서 과연 한 발짝을 더 내딛을 수 있겠냐는 물음이다.
『무문관』제46칙에 이르기를, 석상 화상이 말했다. "백 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어떻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겠는가!" 또 옛날 큰 스님은 말했다. "백 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는 사람은 비록 어떤 경지에 들어간 것은 맞지만, 아직 제대로 된 것은 아니다. 백 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반드시 한 걸음 나아가야, 시방세계가 자신의 전체 모습을 비로소 드러내게 될 것이다."
백척간두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오른 궁극의 자리이다. 다르게 보면, 그 자리는 현실적인 가능성이 꽉 막힌,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최고이자 최악의 지점. 가망이 보이지 않는 사건의 종착지이다. 어쨌든 25m 이상의 아찔한 장대 끝에 마냥 머물 수만은 없다. 용기를 내어 발을 떼어 다른 데로 옮겨가야 한다. 까딱하면 추락해서 부상을 입거나 사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오만 번뇌는 깨끗이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백척간두는 시방세계가 제 모습을 드러낼, 그 마지막 진리를 깨달을 자리이기 때문이다.
사실 화두란 어떤 새로운 사유나 발상법을 위한 신선한 언어적 장치이다. 양적 변화가 아닌 질적 변화를 얻는 지성의 한 형식이다. 칠흑의 어둠 속으로 심신을 떠밀어 넣고는, "자, 어쩔 건가!"를 다그치는 공부법이다. 답은 없다. 이런 "오묘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이런저런 생각이 일어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해야만 한다"(妙悟要窮心路絶). 그런 어느 순간, 오만가지의 생각과 욕망으로 분열된 내면에서 "자연스레 안과 밖이 하나로 합쳐지는"(自然內外打成一片) 절정의 순간을 만난다. 그게 무엇일까?
현재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은 답이 잘 안 보인다. 의대 입학 정원 확대를 포함한 의료개혁안을 두고 정부와 의사의 대치가 그렇고, 야당의 탄핵 폭주와 대통령의 거부권이라는 악순환도 그렇다.
어떤 행동의 동기가 선하다 해서 결과가 좋다는 보장은 없다. 아울러 결과가 좋다고 해서 동기가 선하다는 보장도 없다. 이처럼 동기주의도 결과주의도 모두 완벽하지 않다. 누구나 '최선'이라 생각하며 행위를 한다. 우리의 행위는 대개 한계와 편향성, 결함과 모순을 가질 수 있는 불완전한 '차선'이다. 자신의 생각과 결정이 '틀릴 수 있다'는 자기반성적 태도를 항상 가져야 마땅하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진보・보수의 이념 대립 속에서 '자신이 틀리고, 잘못할 수 있다!'는 걸 용인 못하는 심각한 인지 편향을 굳혀왔다. 당연히 화해와 소통의 기반이 취약해졌다. 따라서 "내 방식대로 세상이 돌아가야 한다"는 포악한 독아론이 횡행하여 "나만 살겠다"고 고함쳐댄다. 아니면 "너 죽고 나 죽자!"는 동귀어진(同歸於盡)의 극단으로 향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백척간두의 '진일보'란 무엇일까. 의식의 카타스트로피(순간적 대반전) 아닐까. 서로의 목을 노리는 진일보가 아니라 아상(我相)의 목을 자르는 상생의 양보여야 한다, 시방세계의 주인은 나만이 아닌, 우리 모두이다. 이런 세계를 '뒤돌아보는' 생각의 변화가 바로 백척간두에서 '진일보'이리라.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댓글 많은 뉴스
"촉법인데 어쩌라고"…초등생 폭행하고 담배로 지진 중학생들
대구경북 대학생들 "행정통합, 청년과 고향을 위해 필수"
"죽지 않는다" 이재명…망나니 칼춤 예산·법안 [석민의News픽]
[매일춘추-김미옥] 볼 수 있는 눈
선거법 1심 불복 이재명, 상법 개정 '공개 토론' 제안…"직접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