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이 사내가 나를 울리네

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펴냄

영화평론가 백정우

'엄마, 작년에 돌아가셨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곧 오함마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가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한참 동안 흐느끼던 오함마는 울먹이며 말했다. 미안하다… 엄마한테 미안하고… 미연이한테도 미안하고 너한테도 미안하고…(중략) 사실 오함마보다 내가 미안한 게 더 많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차마 미안하단 말을 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오함마가 울먹이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284쪽)

나는 이 대목에서 울컥했다. 뜻밖이었다. 남들이 목 놓아 우는 영화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나였다. 눈물샘이 마른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우는 일에 무심하게 살았다. 그런데 낄낄거리고 키득대며 읽던 소설의 종반부. 엄마의 부음을 들은 오함마의 눈물 앞에서 나도 무너지고 말았다. 천명관의 두 번째 장편 '고령화 가족'이다.

한국문단 최고의 구라꾼이라 불리는 천명관. 하긴, 그는 등단하기 이전에 영화판에서 시나리오를 쓰지 않았던가. 김석훈·명세빈의 '북경반점'과 박중훈·이화란의 '총잡이'와 최진실·임성민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천명관의 손끝에서 완성되었다. 그보다 더 전엔 골프용품 매장에서 일했고 보험영업에도 종사한 전력이 있다. 세상 풍파를 온몸으로 겪던 사내가 쓴 두 번째 소설이 '고령화 가족'이었다.

천명관은 초반부터 귀에 쫙쫙 달라붙는 문체, 즉 중요 인물이 처음 등장할 때마다 이미지가 연상되는 독특한 방식으로 기술한다. 예컨대 민경에겐 '죄송하지만 저 성질 좀 있거든요', 수자 씨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 근배는 '생활력', 영화사 사장은 '내 돈 떼먹고 성한 놈 못 봤다' 같은 작법은 그가 시나리오 좀 써본 사람이란 걸 증명해준다. 오함마를 만나러 갈 계획이지만 그곳이 어딘지 말해줄 수 없다고, "혹시 약장수의 부하들 가운데 누군가 이 책을 볼지도 모르기 때문"(286쪽)이라는 너스레로 마지막까지 자기 색깔을 잃지 않는 천명관이다.

"엄마 눈엔 그저 노란 주둥이를 내밀고 먹을 것을 더 달라고 짖어대는 제비새끼들처럼 안쓰러워 보였을까?"(58쪽)

평균 나이 49살의 장성한 자식들은 경제력도 없고 생활력도 없는데다가 자존심도 버린 지 오래다. 실패의 인장이 덕지덕지 붙은 낙오자에 가깝지만 칠순 엄마 눈엔 예쁜 제비새끼들이다. 바람 잘 날 없는 가족들과 겉과 속이 다른 가족사를 짊어진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큰 자식들 입에 삼겹살을 채워 넣는 것 뿐. 그것은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몸을 추슬러 다시 세상에 나가 싸우라는 뜻"이기도 했다. 책의 헌사가 '언제나 텅 비어있는 컴컴한 부엌에서 우리의 모든 끼니를 마련해준 엄마에게' 향하는 건 당연해 보인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작중 화자인 인모는 오래 전 중년 엄마의 쓸쓸한 모습에서 보았던 부서진 희망을 여동생 뒷모습에서 다시 보고는 가족 안에서 특별대우를 받았고 형에게도 빚이 많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에 대한 기대가 부서져 산산조각난 뒤에도 그들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면서 가족이란 무엇인가? 라고 묵직한 물음을 던지는 우리시대 가족로망스. '고령화 가족'은 스몰사이즈 피자 한 판 값 지불할 능력 없는 구매력을 상실한 부류에 관한 이야기이고, 가족의 의미와 관계를 재 정의하면서 엄마를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환한 지상으로 올린 뒤늦은 반성문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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