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는 타고나기도 하고 노력이 승화된 천재도 있다. 이익은 '성호사설' '신동(神童)'에서 날 때부터 천재로 김시습과 이산해 둘을 꼽았다. 그러면서 이런 천재라면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공명(功名)과 사업(事業)이 반드시 천재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비운의 천재라는 말이 생겼나 보다. 세종의 칭찬을 받은 '오세' 김시습의 인생은 삼촌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계유정난으로 인해 송두리째 바뀌었다. 과거를 준비하던 김시습은 무도한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을 버리고 방랑하며 스님이 되었고 울울한 심정을 문학으로 달래었다.
'김시습 초상 목판본'은 17세기 초 간행된 김시습의 여행시집 첫머리에 실려 있다. 그림 위에 '자사진찬(自寫眞贊)'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어 마치 김시습의 자화상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누군가가 판각한 이 초상에 김시습이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그리며 지었던 찬문(贊文)을 함께 새겼을 뿐이다.
김시습은 생전에 2점의 자화상을 그렸지만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그 자화상이 여러 곳에 봉안된 김시습 초상화의 원본이 되었을 것이다. 기록을 보면 김시습의 자화상은 삭발한 승려였다. 유학자의 모습인 '김시습 초상 목판본'과 사뭇 분위기가 달랐을 테지만 이목구비는 원본 자화상에 근거했을 것이다.
김시습은 세상과 불화하는 스스로를 통찰하며, 또는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라며 자화상을 남겼다. 윤두서, 강세황처럼. 김시습은 자신을 이런 사람이라고 했다.
부시이하(俯視李賀) 이하(李賀)를 내려다볼 만큼
우어해동(優於海東) 조선 최고라 했지
등명만예(騰名謾譽) 높은 명성과 부질없는 명예
어이숙봉(於爾孰逢) 너에게 어찌 걸맞으랴?
이형지묘(爾形至眇) 너의 모습은 지극히 작고
이언대동(爾言大侗) 너의 말은 너무도 어리석구나
의이치지(宜爾置之) 마땅히 너를 두어야 하리
구학지중(丘壑之中) 구학(丘壑) 속에
체제에 불응하며 불가로 도피한 이단자 김시습을 주류 유학자들이 적극 끌어안은 것은 선조 때부터다. 대제학 이이는 왕명으로 '김시습전'을 지으며 '심유적불(心儒迹佛)', 마음은 유학을 믿었지만 행적은 스님이었다는 말로 생애를 정리했고, 이듬해 '매월당집'이 계유자 활자본으로 간행된다. 대단한 복권이다.
이후로도 김시습 추숭이 이어진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간(淸簡)'으로 시호가 내려지며 김시습은 방랑 승려에서 절의(節義)의 화신으로 조선 역사에 자리매김됐다. 김시습의 초상화가 유학자의 모습으로 전해지는 이유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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