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보존하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2차대전 때 미군이 독일 전역을 초토화하면서 하이델베르크는 제외했다. 고성의 아름다움을 보호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대로 드물지만 아름다움을 파괴하려는 심리도 있다. 1950년 일본의 하야시라는 도제(학승)가 불교 건축의 꽃으로 칭송되는 금각(사리탑)을 불태우는 사건이 있었다. 경찰 조사에서 스님이 될 사람이 '사리탑의 아름다움에 질투가 나서' 그랬다는 묘한 말을 남겼다. 대체로 정신이상자의 헛소리 정도로 흘려들었지만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방화 사건을 5년간 추적한 뒤 동명의 소설을 써냈다. 오늘날까지 일본 유미주의 문학의 금자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그러나 '금각사'를 단순히 하야시 사건을 소설로 각색한 정도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하야시 실화는 작가의 미론(美論)을 축조하기 위한 비계(飛階) 정도에 그친다. 실로 소설 안에 산재한 미시마의 미학적 착상은 현란하고도 혼란스럽다. 미 자체가 그런 것인지 작가가 너무 젊어서(31세) 그런지 체계적이거나 논리적인 미론을 펼치지는 않는다. 필자는 그의 수많은 미적 단상 중에 몇 가닥만 뽑아 살펴볼까 한다.
주인공 미조구치는 추남에다 심한 말더듬이다. 그는 대처승인 아버지로부터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없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다. 중학생이 되자 아버지의 바람대로 스님이 되기 위해 금각사의 도제로 들어간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 화두는 온통 미(美)로 쏠린다. 이후 그가 금각을 중심에 두고 사색하고 고민한 미론은 크게 두 가지 문제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아름다움이 뭐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왜 금각사를, 즉 미를 파괴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이다.
미조구치가 3층으로 된 금각에서 파악한 미의 요체는 부분과 전체의 조응이다. 흥미롭게도 그는 이 조응을 음악의 원리로 이해한다. 즉, 금각의 세부와 전체는 '음악과 같은 대응 방식으로 울려 퍼지는'가 하면 '완전한 정지, 완전한 무음(無音)'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달밤에는 금각의 가는 기둥들이 아예 가야금 현처럼 보인다. 미조구치는 금각의 미가 음악과 통한다는 인식을 퉁소를 배우면서 더욱 절감한다. 그는 그때까지 뭔가에 탐닉(화신)할 수 없었다. 금각이 늘 방해했기 때문이다. 가령, 여자를 만나 섹스를 하려고 하면 바로 금각의 환영이 나타나 중단시킨다. 금각의 완벽한 미가 어떤 여자도 추한 살덩어리로 변모시켜 버린다. 그런데 음악의 쾌락에 빠질 때만은 예외다.
퉁소를 불고 나서 항상 생각하지만, 금각은 어째서 이러한 내 화신을 책망하거나 방해하지 않고 묵인해 주는 것일까? 반면에 인생의 행복이나 쾌락으로 내가 화신하려 하면 금각은 단 한 번이라도 묵인해 준 적이 있던가? 곧바로 내 화신을 가로막고 나를 나 자신으로 돌아가게끔 만드는 것이 금각의 수법이 아니었는가? 어째서 음악에 한해 금각은 나의 도취와 망아를 허락하는 것일까?(허호, 228)
이렇게 되면 금각은 단순히 아름다운 건축물을 넘어 살아 있는 인격체가 된다. 금각이 그만큼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미조구치의 강렬한 미에의 집착을 말한다. 금각의 미를 좀 더 분석적으로 관찰한 미조구치는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한다. 금각의 모든 부분이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고 불안하기만 한데, 바로 그것이 필연적으로 다른 부분과 연계하고 연합하도록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개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미가 완전에 대한 예감으로 끊임없이 다른 부분과 이어지는 데서 전체적인 미가 나온다.' 더 나아가 금각의 미는 금각만의 것이 아니라 주변과의 연결 속에서 형성된다. 미조구치는 종종 정말 금각이 아름다운 것인지 그 배경이 아름다운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미조구치는 왜 그토록 아름다운 금각사를 불태워야 했을까? 무엇보다 금각의 영원성, 즉 미의 항구성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하고 소멸한다. 진리가 있다면 그런 사실만 진리다. 그런데 금각은 이 진리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조구치는 자신의 삶이 바로 여기에 가로막힌다고 고백한다.
미의 영원한 존재가 진정 우리들의 인생을 가로막고 삶을 해치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삶이 우리에게 잠시 보여주는 순간적인 미는 이러한 독소 앞에서는 맥도 못 춘다.(184)
금각의 영원한 미는 인간이 삶의 과정에서 느끼는 순간의 미를 하잘것없는 것으로 격하시킨다. 그것은 '저주와도 같은 영원'으로 중단되어야 한다. 유사한 맥락에서 금각의 방화는 임제 스님의 유명한 화두와 연결된다. 소설에 몇 차례 인용되는 임제 어록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상을 만나면 조상을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족을 만나면 친족을 죽여서 비로소 해탈을 얻노라.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투탈자재 해지리라.(370)
이 논리에 따르면 미도 죽여야 할 대상이다. 당나라 남천 선사의 한 사례(남천참묘)가 언급된다. 그는 제자들이 예쁜 고양이 한 마리를 두고 서로 갖겠다고 싸우는 것을 보고 고양이의 목을 베어버린다. 스님이 불살생의 계를 정면으로 위반하면서까지 미적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을 설파한다. 물론 그런다고 인간이 정말 미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지, 그의 제자 조주가 물음표를 달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미조구치는 금각이 불타 없어져야 그 미의 영원성이 누르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그래야 '인간이 만든 미의 전체 무게를 확실히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미조구치는 자신의 새로운 삶도 그로부터 시작되리라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미조구치는 실제 방화자 하야시와 결정적으로 갈라선다. 하야시는 금각에 불을 지르고 뒷산에 올라가 수면제를 먹고 칼로 자살을 시도했다. 경찰이 혼수상태에 빠진 그를 살려내어 자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미조구치도 단도와 독약을 준비했지만 호기롭게 계곡에 던져버린다. 그는 불타는 금각을 내려다보며 담배를 꺼내 문다. 그리고 삶의 의지를 불태운다.
일을 하나 끝내고 담배를 한 모금 피우는 사람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이, 살아야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376)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550년 역사의 금각을 불태운 사람이 삶의 의욕을 되살리는 데서 끝난다는 것은 소설이라 해도 윤리적으로 문제가 된다. 따라서 미조구치의 금각 방화는 절대미에 대한 절대 집착을 끊어내는 비유적 퍼포먼스로 보는 것이 적절한 독법인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소설 '금각사'를 오직 미(美)만 추구한다는 유미주의나 탐미주의로 평가하는 것은 적절한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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